906호의 배동차랑 할아버지는 이름이 네 글자이다. 성이 '배동'인지 여쭤보니 아니란다. 성은 '배'씨고 이름이'동차랑'이란다. 일제시대 때 지은 이름인데 해방되고 나서 바꾸려고 하니 그때 돈으로 오 만원을 달라기에 날도둑에게 당하느니 그냥 산다고 한다.
어느 날은 탁자에 종이를 쭉 늘어놓고 골똘히 연구를 하고 계시길래 옆에서 살짝 보니 '이의신청서'이다. 농지를 나라에 팔았는데 아무래도 너무 보상을 적게 받은 것 같아 군에 이의신청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단다.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타이핑이 정갈하게 쳐져 있다.
자부? 자부가 뭐더라? 생소해서 자부가 뭔지 다시 물어보니 '며느리'란다.
맞다. 시누이를 '시누야'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 학교 뒷구멍도 못가 본 할아버지에게 국어를 전공한 내가 한방 맞았다. 할아버지 눈에는 마흔이 넘은 내가 마냥 어려 보이는지 자꾸만 다섯 아들 중 장가 안 간 눔 이야기를 하시는데, 농지 보상을 다섯 아들이 달려들어 마구 뜯어먹었단 소리를 듣고 확 질려서 결혼했다고 커밍아웃해버렸다.
905호의 박정심 할머니는 청상과부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외아들과 결혼했는데, 시어머니가 질투가 심해서 늘 아들과 며느리의 사이에서 잤단다. 그럼 어떻게 7남매를 낳았느냐고 물어보자.
젊었을 때 무척 곱고 소리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다는데 지금 요양병원에 쳐 박혀 있으려니 매일 '낙이 읎어'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근방에 딸이 셋이나 살아서 전라도 광주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시길래,
했더니, 그년들이 3개월이 넘도록 자신을 찾아오질 않는단다. 아차 싶었다. 주말에는 자식들이 당연히 찾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다.
905호 김진호 할아버지는 나만 보면 커피 한잔만 달라고 한다. 당뇨가 있는 할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커피를 줄 수 없으니, 주말에 보호자가 오면 몇 개 갖다 달라고 하라고 설명을 늘어놓고 있자니 옆에 있는 간병사님이 귓속말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당신 아들이 회계사이며 돈을 일 년에 1억 이상 벌고 생긴 것은 최무룡 이상 급이란다. (최무룡이 누군지 몰라 인터넷을 찾아봤다) 커피 한잔 주면 큰돈을 나에게 쾌척하시겠다고 하는데, 돈보다는 잘생긴 아들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결국 최무룡 닮았는지는 확인하지는 못했다.
실습을 시작할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서 괴로웠다. 국방부 시계는 그래도 돌아간다는데 이놈의 요양병원 시계는 멈춘 것 같았다. 혈압을 수십 번 재고 발바닥이 뜨거워지도록 뛰어다녀도 시계를 보면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남은 7시간을 어찌 버틸지, 아니 이번 주는 아니 이번 달은... 한숨밖에 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실습이 지나면서 그래도 나의 시계는 조금씩 재깍재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 배터리를 갈아 끼운 것처럼.
그러나 환자들의 시계는 여전히 방전 중이다. 그곳은 거대한 시간의 진공 공간이다. 매일 병원에 들어설 때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별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9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산소가 줄어지듯이 시간도 점차 소멸되어 버린 것 같았다. 9층 문이 열리면, 나는 어제의 그곳으로 마치 타임 슬립 영화의 주인공처럼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늘이 반복 중이다.
주말에 집에서 뒹굴다가 보면 시간이 벌써 흘러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시계는 정상 작동되고 있고 특별히 주말에는 더 빨리 돌고 있다. 그러면 그 별에 계신 분들은? 주말에도 찾아오는 사람 없이 평일과 똑같이 하염없이 누워있는 그분들의 시계는 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