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의 자백

by 소서


마음이 유난히 무른 날에는, 조용히 스치는 빗물에도 베일 때가 있다.



그 빗물을 쏟아낸 하늘은 한때 내가 가장 깊이 우러르던 푸름을 품었고, 눈부신 볕을 내리기도 했으며, 내 현실 위에 무지개를 띄워 동화 같은 착각을 심어주기도 했다. 영원히 맑을 거라 믿은 적은 없었다. 다만 영원히 맑아주기를 바라는 기도는 늘 내 안에 있었다.



믿지 않으면서 바라는, 가장 모순적인 기도.

내 안이 흙빛으로 꺼져갈 때,

너의 빛만이 유일한 구원 같아서.



그러나 무심코 쏟아진 찰나의 소나기 앞에서 내 발밑은 속수무책으로 진창이 되었다.

물은 순식간에 바닥을 바꾸고,

바닥은 순식간에 나를 바꿨다.

어지러이 튀어 오르는 진흙 앞에서 나는 나의 어둠을 탓하지 않았다. 비만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뭉개지지 않았을 거라고. 네 변덕이 내게 얼룩을 묻혔다며, 나는 너를 탓했다.



하늘은 야속하게도 금세 개었다.

너는 늘 그랬다. 그렇게 매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맑아지는 쪽을 선택했다.



내게도 볕 드는 날이 찾아왔지만, 너를 원망했던 흔적은 말라붙은 얼룩이 되어 살갗에 들러붙었다. 햇빛 아래서 더 또렷해지는 오염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딱딱하게 굳은 얼룩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또다시 너의 변덕, 그 축축한 빗물에 젖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사무치게 증오했던 그 변덕이,

또 어느 날은 그토록 간절해졌다.


나는 내 오염을 받아들이기보다,

차라리 저 널뛰는 변덕에 적응해 버리기로 했다.

원망이 흐르는 통로에서라도, 숨을 쉬어보려 했다.


너의 변덕을 진심으로 미워했고,

동시에 처절하게 사랑했다는 뜻이다.

이제는 치유조차 너의 기후 안에서만 가능해졌다.


미움은 떠나지 못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나는 이제 네가 만든 계절로만 회복하고,

네 기후로만 살아남는다.



어느 날 문득 깨끗한 살갗을 상상해 보았다.

흉터 없는 피부,

사라진 통증,

무엇에도 젖지 않는 하루.

그런데 그 무결함이 내게는 평온이 아니라 공포였다. 상처가 없는 몸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견뎌온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나를 붙들던 서사까지 함께 증발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얼룩을 택했다. 얼룩이 있다는 사실로 내가 아직 네 곁에 있음을 확인하려 했다.



결국 나를 더럽힌 건 너의 비가 아니라, 너의 맑음이었다. 언제나 다시 개어버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해지는 너의 얼굴. 그 순수함이 내게는 가장 잔인한 증거였다. 너는 말끔해지고, 나는 남는다. 내 몸에 남은 것만이 너와 함께였다는 유일한 흔적이 되었다.



나를 이토록 지독한 변덕 속에 살게 했으니,

너는 그 변덕을 멈춰 선 안 된다.



나는 이제 나를 내 손으로 씻어내지 못한다. 내게 받은 사랑에 증오가 묻어 있어도, 그것을 감당하는 방식 역시 너의 몫이 되었다. 내 감정의 윤곽은 이미 네 기후를 본떠 자랐으니. 너는 내 곁에 머무름으로써 이 폐허의 몫을 져야 한다.



얼룩진 내 손보다,

금방이라도 놓일 것 같은 너의 손이 더 두렵다.



너를 미워한 모든 순간들에,

사랑이 서식했음을 부서지듯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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