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쓴다. 아주 오랜만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것 같지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나는 주로 일을 할 때 글을 쓰므로,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오래 쉬었다는 말처럼 들릴 수는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겨우 이틀을 쉬고 다시 일을 하고 있다. 글을 쓰지 않은 이틀은 아주 오랜 시간이지만, 쉰 날은 겨우 이틀인 것이다.
2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왔다. 커피도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커피를 한 잔 사서 그 커피를 산 매장에서 글을 쓰고 있다.
3
지나간 날을 기록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 아름다웠던 날들이기에 흘러가버린 그날들이 아쉽다. 하다 와 우주와 함께하는 저녁이 매일 행복하다. 자라는 너희가 아쉽다. 너희와의 시간이 아쉽다. 그렇게 시간에 빼앗겨 버릴 우리의 기억들이 슬프다.
그래서 그냥 하루에 몇 번이나 아이들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뱃살을 쓰다듬으며 부둥켜안고 좋다고 아 좋다고 말하곤 한다.
시간은 가고 세상은 변하겠지. 아이들은 자라고 나는 늙겠지. 나는 우리의 삶을 찾는 중이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테지. 다가올 미래가 아득히 보이다가도 오늘의 행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면, 그러면 그냥 나는 너희를 꼭 안고서 눈을 감아버린다. 시간을 가두어 본다.
언제나 기억하고 싶은데. 이 기억을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몇 걸음이나 더 함께 할 수 있을까. 이 슬픔은 행복의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한 책은 물었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슬픔. 슬플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을 아는 거지.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행복이 뭔 지 아는 거지. 그러니까 슬픈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는 거지. 행복해 본 적이 있는 거지.
4
<불안의 서>
불안의 서를 읽는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책을 읽다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남편이 읽고 싶은 책을 물어와서, 나는 이 책을 사달라고 했다. 배송이 온 책은 비닐로 진공포장이 되어있었고, 그 위로 에어캡을 다시 감싸 다시 딱 맞는 작은 상자에 넣어져 배송되었다. 책을 꺼내어 들었을 때, 비닐 안에 검은 오염이 보였고 수백 장에 걸친 그 자국이 보기 싫었다. 책을 교환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남편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은 한 달 정도 책장 안에 세워지지 못했다. 나는 읽은 책들 위에 이 책을 비스듬히 대충 올려두고 방치했다.
마음이 불안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날엔 그런 마음을 긁는 단어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이 책의 비닐을 벗겨내어 지저분한 저 오염과 맞설 때구나. 싶었다. 비닐을 북 찢어내어 오염 부위를 확인했다. 아이의 지우개를 들고 그 부분을 살살 지웠다. 흔적은 남았지만 전처럼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즉 책의 9-10 정도의 글을 읽으며 나는 이 책은 내 가슴에서 꺼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는 언제나 폭풍우가 분다. 그러니 멀쩡히 달려있는 감정과 단어의 나뭇잎이 많을 리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람을 이기고 자라 내어 이윽고 짙었던 녹색을 잃고 떨어지는 숱한 문장과 단어들이 늘 있다. 한창 메말라 가는 그 낙엽들을 갈퀴로 긁어 보아 커다란 마대자루에 담는다. 담고 또 담는다. 그 낙엽들을 다시 한데 풀어다가 쌓는다. 어디에선가 하얗고 바닥을 끌지 않고서는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염을 가진 마법사가 등 한다. 그가 요술봉을 휘두르면, 바로 이 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불안이다. 불안의 결정체이고 불안은 나다. 나는 책이고 이 책은 결국 나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내 나는 확신했다. 내 생에 몇 안 되는 인생 책. 죽어서도 이 책의 오염 진 부분이 다 바래질 때까지 버릴 수 없는 책이 되리라는 것을.
이 두꺼운 책을 어떻게 읽지? 싶었다. 책은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표지는 어둠 그 자체였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언젠가 다 읽을 수 있을까 두려워졌다. 그러나 이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이 책이니까. 결국 이 두려움의 마음도 어느 한 장의 이야기로 있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5
쓰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직을 고려한다는 말을 꺼낸 것. 그로 인한 파동, 걱정, 두려움과 엄습하는 슬픔까지. 쓰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다 쓰지 못했고, 시간은 사라졌다. 조금 쓴 글, 아주 쓴 커피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제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을 하러 가야 한다.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