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성간의 조율 그리고 타자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의 음조》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피로사회》보다 이번 책은 저자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서 느껴져, 진입장벽이 조금은 낮아진 듯했습니다. 음악 앞에서는 마음이 풀어진다고 할까요?
내용이 여전히 쉽지 않지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슈만의 <아침의 노래>등등이 중간에 언급되어 그 곡들이 이 책의 어려운 문장들 사이의 긴장을 누그려뜨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최대한 천천히 읽으려 했습니다. 정말 충분히 사유하고 싶었거든요. 요즘 저는 특히 '질문'을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인생에 대해서 제가 꼭 해결하고 싶은 질문요. 이를테면 이런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좋아하며 충만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매순간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허무와 나태와 비교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으며 그저 내 삶을 살 수 있을까?
(특히 이 질문은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8월 8일 저의 화두네요. 언젠가 이것에 관해 브런치에 꼭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시점은 7월이어서 당시의 화두 및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어떤 대상(또는 사람)에 대해서 압도적으로 끌릴 때
그 감정을 그저 감정의 영역에 두어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분석하고 사유해 의미/합목적성을 찾아야 할까?
여하튼 이 질문을 마음속에 꼭 붙잡고 책을 읽었고,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다소 편향된 하지만 저만의 해석이 될 것 같아요.
이 책은 “아름다움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환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면, 결국 아름다움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울림이라는 뜻이 되겠죠. 사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것 앞에서 거창하고 현학적인 말이 바로 나올 수 없거니와, 몸이 벌써 그 울림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도 하니 그다지 어려운 개념은 아닐 것 같아요.
저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 기원과 이유를 밝히고 싶어 하는 성향이 상당히 강합니다. '넌 너무 분석적이야' 라고 사람들이 말하죠. 제 기준에는 정말 이 감정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싶고 언어화하고 싶어서이기는 한데 사실 그러한 성향이 때로는 '불안'을 키우기도 하는 것 같아요. 왜 이 음악이 이토록 강렬히 나를 흔들어 놓는지, 왜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압도하는지 그 이유를 말로 다 밝힐 수 없으면 불안해지더라구요. 이성과 논리, 언어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저 세계에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제게 저자는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오직 이성(로고스)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파토스’는 강렬한 감정·정서·열정을 뜻하는데, 저자는 이 파토스가 로고스를 보완할 때 비로소 사유가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논리와 분석만으로는 건조해지고, 감정만으로는 깊이를 잃기에, 아름다움은 두 축의 균형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몇 주 전에 쇼팽의 '‘Rondo à la Krakowiak’ 이라는 곡을 우연히 들었어요. 서두를 듣자마다 뭔가 심상치 않아서 멈춰섰는데, 15분 동안 연주되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 곡을 다 듣고나서, 저는 갑작스레 볼이 발그레해지고 심장이 뛰면서 혼자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와, 1등이 바뀔 수도 있겠다'
사실 저는 항상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괜히 골똘해지고 치열해지는데 그 질문은 이것이에요 '신이 당신에게 어느 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단 1곡의 클래식 음악만을 들을 수 있으며, 나머지 그 어떤 곡도 들을 수 없다면, 무슨 곡을 고를 것인가' 그 답의 2025년 상반기 버젼은 이러했어요. '하느님, 엘가의 The Snow/베토벤의 월광/포레의 레퀴엠' 중에서 고를 건데요. 저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발요 ㅠㅠ'
그런데 이번 주 그 혼자만의 선문답에 쇼팽의 이 곡이 추가가 된 겁니다. 한병철 님의 <생각의 음조>에서 쓰인 철학 용어를 응용해보자면 이 곡이 가진 파토스가 저를 완전히 사로잡은거죠.
쇼팽의 이곡을 왜 이리 좋아하는 걸까? 뭔가 거창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아직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사실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저는 일요일 이른 아침 헬스클럽에 있었고, 헬스클럽 스피커로 흘려나오던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제 이어폰까지 침범하고 있던 와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 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순식간에 제 귀를 잡아끌었고 저는 놓치지 않으려고 바로 선곡표를 찾아 이 음악의 제목을 기록했어요. 그렇게 저에게 이 음악이 와 주었네요.
왜 이렇게 좋은지 분석하지 않고, 그저 이 음악이 내게 온 순간을 오래 붙잡아 두기로 했어요. 언젠가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머무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랑을 허락하는 것, 그게 음악이고, 그게 파토스이며, 로고스에만 기댔던 나를 조금씩 풀어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성적 욕망' 정도로 금세 이해되기도 하지만 에로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다른 존재) 자체에 끌리는 힘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에로스는 '타자성'으로부터 발현한다고 해요. '타자성'은 '나와 다름의 근원 즉,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의 실체'를 뜻합니다.
저자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 알고리즘과 취향 추천, 반복되는 자기 복제 속에서 점점 더 나와 닮은 것만을 선택하고 있으므로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마주할 기회가 줄어들고 그리하여 결국 진짜 에로스는 자라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제가 현대사회를 비판까지 할 깜냥은 안되고, 저는 대신 '타자성'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서 이에 대해서 좀더 상세히 찾아봤네요
타자성은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의 존재 자체를 가르킨다.
에로스는 바로 이 타자성에 대한 응시, 감응, 침묵 속의 기다림에서 피어난다.
타자성은 때로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나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타자성'이라는 개념에 호기심이 생겨 오래된 기억 속 일기장까지 들추며 내게 에로스를 유발했던 타자들을 돌아봤네요. 이제는 무감해져 아무런 파토스를 남기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고,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고통'으로 여실히 이어지는 타자도 있네요. 아직 복잡한 감정이 남아있는 저를 책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요.
돌이켜보면, 저는 마음에 들어온 타자에 대해 '온전히'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다면, 왜 그 음악에 끌리는지까지 모조리 알고 싶었죠. 항상 이유를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 역시 이유와 언어화에 대한 저의 집착일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제 방의 구석구석을 다 청소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나 자신조차 내 안의 모서리까지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인생에 들어온 타자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모서리까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는 생각과, 모든 것의 작동체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늘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타자는 늘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안 속에서 더 불타오르는 에로스를 경험했습니다.
결국 일상은 흔들리고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에로스로 인한 불안은 숨어 있던 감각과 갈망을 깨우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곧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느낌, 고통이 깊을수록 생명이 더 선명하게 살아나는 아이러니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한편 저는 항상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는 했다는 것이 얼마 안되는 저의 저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이 글을 한번 쓰기도 했지만요 [음악] 고통의 끝에서 음악이 시작되다 저는 인생에 위기나 아픔이 없는 사람의 글이나 그러한 음악가의 음악은 결코 좋아지지 않더라구요. (나와 우리가 베토벤을,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이유에 저는 분명히 그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타자에 의해 흔들리는 것은 누군가 때문에 내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의 생명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호라고. 다만 앞으로도 이 불안을 불안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생명의 일부로 받아들일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한병철은 ‘희망’을 이야기하며,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을 인용합니다. 희망이란, 현실에 신용을 부여하는 것. 그 말이 참 낯설면서도 오래 남아서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해 봤습니다.
희망이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감정, 그것이
미래에 분명히 영향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말은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수학자 허준이 교수가 했던 말과도 겹칩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 오래된 질문은 ‘오늘부터의 매일’이 답해줄 겁니다' 라는 말요. 이 문구가 너무 좋아서 얼마전에 브런치에 글도 썼더랬어요 '내 삶은 오늘부터의 매일'이 답해줄거야' 때로 공허함이나 허무함이 저를 찾아오더라도, 저는 저 문구만 들어도 자세를 고쳐앉고 약간의 심호흡을 합니다. '괜찮아, 오늘 하루의 최선은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을거야. (허준이 교수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나약해지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라구요
마지막 챕터는 유난히 쉽게 읽혔습니다. 희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 책에서의 희망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매일의 삶이 그저 개별적으로 흩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과 음악과 관계의 진동이 미래의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나를 내일로 이끄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임을 잊지 않으려구요
P.S
어려운 책을 어렵지 않게 쓰고 싶었습니다. 현학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그저 제가 느낀 것만 솔직하게 적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글에 그 마음이 잘 담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쇼팽의 Rondo à la Krakowiak… 정말 좋지 않나요? ^^
구독자 수도, 조회 수도 적지만, 폴란드의 어느 젊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버전이 제 마음에는 가장 깊이 남았습니다. 언젠가 이 곡이 왜 이렇게 좋은지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더라도, 그 전까지는 그냥 이 설렘 속에 오래 머물고 싶어요
https://youtu.be/SNGVDQlsgJ4?si=Tig4X4n2CifKReQc&t=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