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기사 김재식

퇴사 10일째, 그에게 카톡이 왔다

by 사샤
기자를 그만두고 쓰는 <기자, 널 사랑하지 않아 1>의 첫 글입니다. 제 퇴사 썰이 궁금하신 분은 ‘[공지] 45일 만에 돌아온 사샤입니다’ 제목의 게시글을 참고하셔요.


퇴사 10일 차, 우연인 듯 필연처럼 그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시냐고. 꼭 퇴사한 지 열흘 된 걸 직감으로 알게 된 사람처럼 그는 연락을 해왔다. 택배 기사 김재식. 그도 나도 이제 더는 택배 기사가, 기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말연시에 좋은 때를 맞춰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그런 인연이다. 방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말에 따르면 “감사하고도 귀한 인연.” 이런 인연이 될 줄은 그도 나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특히나 5년 전 그날들에는 정말로.


이 브런치 북의 하이라이트인 ‘택배 기사 김재식’. 두 달 전에는 이 글이 그렇게나 안 써졌더랬다.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렁이는 게 느껴져 차마 키보드를 두들길 수가 없었는데 말이지. 사샤, 너는 기자가 아닌 네가 돼야만 비로소 이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어, 라는 우주 만물의 다르마가 작동한 건 아닌가 싶기까지 한 것이다. (매거진 <나의 심연>의 글 ‘다르마(dharma)’ 참고.) 드디어 키보드를 ‘터치’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은 김재식 지회장과 40분 넘게 통화한 뒤다. 그는 강원도 D 지역에 처음으로 꾸려진 택배 노동자 노동조합, 택배 노조 D 지회의 대표였다.


야, 우리도 택배 노동자 과로사,
이런 것 좀 취재해야 되는 거 아냐?


훗날 노조 지회장이 될 김재식 택배 기사를 만나게 된 건, 어느 날 사무실에서 들려온 이 볼멘 목소리 때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송국장, 당시 내게 제일 높은 상사.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보도부 사무실로 들어왔다. 보도부장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심드렁한 말투였음은 분명하다. 2020년 가을. 막 ‘택배 노동자 과로사’ 문제가 핫이슈로 대두되던 때. 그 시공간에서 나는 기사를 쓰고 있었는지 퇴근 시간까지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컴퓨터 앞에 있으려고 용을 쓰던 찰나였는지, 국장의 저 말이 귓구멍 속으로 콱 박혔다.


이미 나는 선배, 동료들 사이에서 노동 분야 담당 기자로 통하고 있었다. (이 브런치 북 8화 ‘추락사 1명’ 참고.) 부장과 선배들은 노동 기사를, 특히 나의 노동 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사마다 지자체나 경찰 등 소위 지역 권력을 날 서게 비판해서였을까. 진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크고 작은 미움을 1년 가까이 받다 보니 자연스레 위축된 상태였다. 노동 분야 취재를 망설이게 됐다. 아무리 패기 넘치는 2년 차 기자였을지언정 얼굴 맞대고 일하는 이들과 매일 같이 부딪히는 일은 솔직히 ‘못할 짓’이었기에.


더욱이 그래서 마음이 아파왔다. 서울과 수도권의 택배 노동자들과는 다른 형태로, 어쩌면 더 심각한 수준으로 과로사 위험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강원도 택배 노동자들의 하루하루가 궁금했다. 하지만 선뜻 누구에게도 전화 한 통 걸 수 없었다. 질문을 던지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노동 기사를 쓰겠다고 부장께 선포하고 취재, 기사 작성, 보도로 이어지는 험난한 과정을 또다시 밟아갈 엄두가 안 났다. 기사 하나를 쓰기 시작하면 ‘꼬꼬무’ 식으로 기사가 기사를 낳기 마련이니까. 언제까지 눈치 보이는 취재를 이어갈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번에는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문득 여유가 생긴 날에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다. 강원도 내 18개 시군에는 애초에 택배 노조가 있는 지역이 3곳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노조가 없으면 아무래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사각지대 아래로 가려질 수밖에 없다. 전국의 택배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을 만큼 피폐한 노동 환경에 있음이 드러난 이상, 노조가 강원도에 이렇게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사가 됐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D 지역에 택배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 김재식 기사를 만나게 됐다.


촬영기자 동기와 김재식 기사의 배송 차량에 탔다. 어둑어둑한 시간이 돼서도 한시도 쉬지 못하는 그의 하루를 방송 리포트로 제작했다. 그 뒤로도 대형 택배 회사의 노조 가입 방해 의혹, 택배 대리점과 기사 사이 불공정 계약 등을 다룬 뉴스를 연이어 보도했다. 그렇게 세 번째 택배 기사 아이템을 부장께 발제한 날이었던 것 같다. 부장은 “택배 기사는 언제까지 할 거냐”며 나를 째려봤다. 사실상의 취재 중단 지시였다. 보고와 회의를 거쳐 영상 취재 일정을 잡아놓은 당일, 석연찮은 이유로 부장이 현장을 못 가게 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실제 이듬해 봄에 ‘치맥’ 파티로 내 이직 환송회를 성대히 치러준 이들은 김재식 지회장과 취재에 협조해 준 택배 기사들이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는 말 그대로 D 지역 택배 기사들이 겪던 부조리를 극에 달했기에, 또 여러 가지 이유들로 가장 높은 강도의 투쟁인 파업을 반복하다 보니 김재식 지회장은 아팠다. 지회장이 된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그의 투쟁 파트너이자 내 취재원이었던 L 택배 기사도 확연히 몸이 불어갔다. 고생을 해서 붓는 거라고 했다. 와중에 서울의 언론사에 이직이 확정되며 나는 그들 투쟁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D 지역을 떠났다. L 기사와 김 지회장도 얼마 더 못 버티고 다른 지역으로, 다른 업계로 떠났다. L 기사의 제보는 이직한 언론사에서 내가 선보인 첫 뉴스가 됐지만, 제보도 투쟁도 잊고 싶은 기억이 돼 버린 건지, L 기사와의 연락은 오래전 끊겨버렸다.


퇴사 10일째 날 통화에서 김재식 지회장은 L 기사를 추억했다. 내 이직을 축하해 준 치맥 파티를 그리워했다. 나 역시 L 기사를 다시 만나 그때처럼 다 함께 맥주나 실컷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퇴사 사실을 알리자 김 지회장은 “뭘 해도 멋지게 잘하실 것”이라고 나를 응원해 줬다. 진심이었다. 7년가량 여러 사람을 만나며 갖게 된 나만의 직감, 분별력이다. 이 글을 쓰며 김 지회장과 내가 만나기로 한 12월을 생각한다. 5년 전 성탄절에 그와 L 기사가 사무실 내 자리를 찾아왔었다. 롤케이크와 쿠키를 책상에 두고 가셨다. 이후 5년 더 기자 생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선물을 발견한 그날만큼의 따뜻함을 취재원으로부터 느끼지 못했다.


트리 뒤로 쿠키와 롤케이크가 보이시려나요. 제가 느꼈던 따뜻함의 실체랍니다

‘새벽 배송’을 두고 찬반 논란이 거센 요즘, 택배 노동 문제를 취재했던 전직 기자로서 어쩔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이 올라온다. 내 손을 떠난 취재거리, 기자가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꼭 어느 언론사 소속이 돼야만 기사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실상 취재에 뛰어들 마음까지는 먹어지지 않는 퇴사 열흘 차 인간인 것이다. 다만 기자 시절 이야기를 비교적 담담하게, 그리고 마침내 이 글로 써낸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취재도, 글도, 브런치 북도, 내 인생도 현재 진행형일 뿐이다. 그저 매일을 있는 힘껏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라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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