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이야기
아내는 안단테네 아저씨를 <칸트 아저씨>라고 불렀다. 매일 출근시간은 물론이고 퇴근 시간도 거의 어김없이 일정해서 그렇게 불렀다.
철학자 칸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그곳 시민들은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 시각을 맞췄다는 얘기가 있다.
아내는 칸트 아저씨는 정말 성실한 사람이어서 집안일도 많이 도와줄 뿐만 아니라 정원 관리나 주택보수 등 바깥일도 꼼꼼하게 잘하더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곤 했다. 나도 좀 닮아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안단테네에 가보면 집이나 그 주변이 너무나 정갈하고 아름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어 나는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단테네 아저씨는 손재주가 좋고 집수리나 보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비를 창고 안에 모두 구비해 놓고 있었다.
하루는 아내가 호박넝쿨이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지지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안단테네에 견학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때 거기에 필요한 거물 망을 빌려와서 우리 집 뒤편 텃밭에 설치하는 데 이틀이나 걸렸으며 거물 코를 하나하나 지지대에 묶어 주는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그것은 긴 시간과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바느질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너무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배울 점도 많지만 피곤한 것도 있는 법이다.
어느 휴일, 안단테네 집에서 나무 자르는 기계음 소리가 “찌이잉~”거렸고 타카 박는 소리도 “따쿵! 따쿵!”하며 경쾌하게 들려왔다. 우리 동네는 소음이 그리운 동네다. 하늘도 침묵 속에 있고, 산도 침묵 속에 있다.
지나가는 구름도 침묵 속에서 흐른다.
<가보지 못한 길> 또한 침묵 속에 누워있고 나도 침묵 속에서 그 침묵하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은 소란했다.
그나마 그 침묵을 이따금 깨워주는 소리는 새소리였고
특히 아침에 텃밭에 앉아 듣는 새소리는 너무나 청명하게 귓전에 울려와서 눈을 감고 그 소리의 마지막 여운까지 듣기 위해서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주의를 마음속 소란에 둘 것인지, 아니면 청명한 새소리에 둘 것 인지는 그 순간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라고.
휴일의 정적을 깨워주는 “찌이잉~”, “따쿵! 따쿵!”소리는 동네에 뭔가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안단테네 집 무슨 공사하나 봐?”라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수려한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 차실을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차실은 대부분 휴일에만 공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끝나기까지 꽤나 시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 차실은 장군이의 방이 되었다.
장군이는 세한도집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이다. 세한도집은 우리 집 거실에서 보면 맞배지붕의 아담한 붉은 벽돌 주택으로 그 너머로 여러 그루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아내와 나는 추사의 세한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장군이가 세한도집에 살 때는 이름이 <까망이>였다고 한다. 얼룩무늬가 있지만, 전체적인 검은색 이미지를 심플하게 <까망이>라는 귀엽고 친근한 이름으로 표현해 준 것이리라.
장군이가 고향 집을 떠나 북쪽을 향해 나아가서 안단테네 집으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아내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안단테네 집에는 '행운이'라는 귀여운 암컷 고양이가 있는데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장군이가 행운이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찾아갔다가 눌러살기로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카사노바 때문이라는 추측이 사실에 가까우리라는 것이 아내의 이야기이다.
장군이가 까망이 시절에 살던 세한도집에서 재준이네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1분 정도 거리인데 그곳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카사노바를 장군이가 아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길에서 우연히 카사노바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곧바로 돌아서서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군이는 카사노바를 마주칠 일이 없는 우리 동네를 선택했고 그 동네 집들 중에서도 안단테네 집에 운 좋게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든 동물을 사랑하는 안단테네는 마당에서 서성이는 생면부지의 장군이를 기꺼이 받아 주었을 것이다.
세한도집 부부도 장군이를 여러 날 동안 찾아다니다가 안단테네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집에 가자고 여러 번 설득을 했는데도 완강히 거부해서 데려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대신에 세한도집 부부는 가끔 장군이를 보기 위해 안단테네 집에 들렀고, 재준이네도 장군이를 잘 알기 때문에 장군이 소재가 밝혀지면서 안단테네에 들리곤 했다. 재준이와 민준이가 안단테네 대문에 들어서면서 “까망아!”하고 부르는 것을 나도 몇 번
보았다.
장군이의 이주 동기가 카사노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가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이가 그토록 두려워했다는 카사노바, 카사노바 곁에 있기를 원하는 나비, 그리고 나비를 사랑하는 장군이. 이 삼각관계에서 카사노바에 대한 그 극심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나비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사랑의 불가해한 힘이 아니고서야 그러한 용기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피해 스스로 떠났던 고향 동네를 사랑을 찾아서 제 발로 다시 찾아야 했던 장군이는 결국 혹독한 사랑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다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이가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멍한 눈으로 기운 없이 축 쳐져있는 것을 봐야만 하는 안단테네도 가슴이 몹시 쓰렸을 것이다. 장군이가 사랑의 열병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안단테네가 장군이를 중성화해서 새로 지은 차실에서 살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군이가 그곳에 입주하고 시일이 좀 지난 뒤에 우리 가족은 장군이를 만나러 갔다. 그 차실에는 행운이도
같이 있었다.
바닥은 부드러운 직물로 포근하게 덮여있고 여전히 바깥 경치가 잘 보이도록 창문도 잘 나 있었다. 실내에는 고양이 놀이기구가 놓여있고 벽면에 고양이가 앉을 수 있도록 선반도 설치해 놓는 등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편의시설에서 장군이와 행운이에 대한 안단테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장군이~ 오랜만이네”하면서 안아 주었고 장군이도 두 눈을 말똥거리며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아주 오래간만의 눈 맞춤이었다.
그리고 장군이도 나처럼 <가보지 못한 길>에 들어섰음을 새삼 느꼈다. 자신의 드넓은 영토와 그곳에서의 추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겨울에는 따뜻하며 여름에는 시원한,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의 식사를 할 수 있는 창문
달린 사각의 공간에서 새로운 길을 마주한 것이다.
과거는 흘러갔다. 그 과거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상관없이 흘러간 것은 없는 것이다.
나는 과거란 눈 위의 발자국과 같다고 생각했다.
눈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은 제 자리에 선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녹아 없어져 그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다.
‘없는 것은 없는 것임을 꼭 명심해라. 그리고 지금 서 있는 곳을 잘 보라. 거기에 너의 평화가 있을 것이다. 없어진 발자국을 찾아 헤매면 거기에서부터 너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시작될 것이다’라는 말을 장군이에게 <가보지 못한 길>의 선배로서 해주고 싶었다.
장군이가 카사노바에 대한 두려움도 이제는 떨쳐냈기를 바랐다. 카사노바가 장군이에게 “나를 두려워하라!”라고 말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두려움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장군이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사경을 헤맬 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랑 속에서 녹아 없어지지 않는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장군이는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닐 것이다. 그냥 자신 앞에 맞닥뜨린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다. 용감할 때도 있고 두려워할 때도 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누구나가 그러한 삶 속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길에 서 있을 뿐이다.
달리 별다른 존재가 있겠는가? 있다면 별난 체하는 것이겠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죽는 존재도 있을 것이고 모르고 죽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 있을 때 그냥 서로 사랑해 주는 것이 그나마 남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