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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치곱슬 Jan 22. 2024

2. 80년대 가장 축복받은 유년시절

나는 70년 후반 최루탄 냄새가 극에 달할 때쯤 서울 행당동 어딘가에서 태어났단다.


하지만 내 기억의 시작은 암사아파트 12동 302호에 살 때부터이고

그때 나이가 5~6살 정도였는데 할머니, 부모, 3살 터울 형과 같이 살았다.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파트 놀이터, 문방구 오락실,


가게가 있던 상가, 그리고 쪽문으로 아파트를 벗어나면  


퐁퐁을 탈 수 있는 넓은 공터와 거기서 팔고 있는 달고나,


떡볶이 리어카가 도로까지 쭉 이어있는 전경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 그 아련한 냄새까지도 물씬 맡을 수 있을 지경이다.



한강 바로 뒤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바로 옆 양지마을에서 메뚜기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며

대보름날에는 분유깡통에 구멍을 뚫고 짚불을 넣어 쥐불놀이도 즐겼다.


도시와 촌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한 동네였고

나는 두 경계를 넘나들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파트였지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아래층 형, 누나 집에 초인종을 눌러 엄마가 올 때까지 형이랑 놀았다.


저녁때가면 밥까지 얻어먹고 오는데 아랫집 형, 누나도 자기 집에 아무도 없으면 우리 집에서 놀다 갔다.


혹여나 아랫집에서 저녁밥 먹고 잠이 들어버리면

엄마가 날 업고 집으로 옮겼다.  


이땐 이런 게 당연시 여기던 시절이었다



가끔 이 시절 감정과 정경이 그리울 때는 유튜브로 80년대 일본 코카콜라 cf를 본다.

80's coka cola cf


'행복과 여유로움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토요일 오후 같은 일상'


10분 간 이어지는 이 영상을 볼 때마다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에 콧잔등이 잔뜩 시큰해진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 곱슬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9남매 중 차~남이시며 광산 김 씨에~ 0자 0자이십니다.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 75....... "



- 옳지 잘한다. 어른들 만나면 인사 꾸뻑 잘하고

  꼭 저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아버지는 가정교육을 우리 형제에게 철저히 가르치셨다.


뭐, 적당히 음과 율을 섞으면 금방 외워지긴 하더라


그렇게 나는 인사를 잘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난 거기에 더해 허리를 더 깊숙이 굽혀 인사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인사 공손히 하는 아이를 보면 종종 주머니를 뒤적거리신다는 걸 깨닫고 나서다.


꽤 오래 걸리는 폴더 인사를 하고 초롱초롱 눈빛을 보내면 [실은 손도 내밀고 싶었음]


'허~ 요놈 봐라' 하시며 100원짜리 동전을 주셨다.


가끔 운이 좋으면 지폐도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폐보다는 동전이 좋았다.


왜냐면 지폐는 내가 함부로 쓸 수 없고 무조건 주택은행에 상납해야 했지만

[내 돈을 왜 저 아줌마에게 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름. 그냥 엄마가 시키니까 함]


동전은 배타적 권리를 갖기에  그 누구의 허락 없이 내 의지대로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



이때 100원이면 즐길 것이 무궁무진했다.


B29 과자에 땅콩캐러멜을 먹을 수도 있고, 퐁퐁 20분, 달고나 2개, 떡볶이, 문방구 오락실 5판이나 할 수 있는 돈이다.


물론 500원이 있으면 저 전부를 다 할 수 있지만 항상 재화 보단 자본이 부족했다.


그래서 손에 100원이 쥐어지면 무엇을 해야 가장 만족감이 좋을지 선택과 집중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다.


 

세상은 이렇게나 쉽다.


어른들에게만 잘하면, 누군가를 잘 섬기면, 또 돈이 나오는 권위에 순종만 하면 잘 살 수 있다.


'세계 어린이 인사 잘하기 대회'가 있었음 참 좋을 텐데,


그럼 동전이 어마어마하게 쌓일 테니까


참~ 어린 나이에 세상 이치를 너무 빨리 깨우쳤다.




얼마 후 8살이 된 나는 아톰이 그려져 있는 우주표 가방을 메고 오전반과 오후반을 넘나드는 국민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나는 깍두기를 조기 졸업하여 정규멤버로 인정받았는데


이건 진정 자부심을 가져도 될 일이다.

[아파트로 들어오는 소독차의 경로를 미리 파악해 열과 성을 다해 쫓아다닌 보람이 있었네.] 



아파트 8살 중에서 깍두기가 아닌 아이는 나와 태환이 빼고는 없다.


고로 8살까지는 대부분 깍두기란 소리다.  


깍두기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마치 투명인간 같은 존재랄까?


술래잡기에서 꽁꽁 숨어도 술래는 깍두기를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다방구 할 때도 깍두기가 손을 끊고 아무리 다방구를 외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동네에서는 깍두기가 점수 내도 카운팅 안 해주는 야박한 룰을 가진 곳도 있었다.


같이 놀았지만 같이 논 게 아닌 유령 같은 8살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왜 이렇게 8살 기억이 생생할까?


엄마손 잡고 놀이터 가고 쇼핑몰 다닌 2020년대 8살과


혼자 스스로 놀거리를 찾아 나선 1980년대 8살의 추억 스펙트럼 넓이는 다를 것이다


8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었다.



그렇게 행복이 영원할 것 만 같았던 어린 삶에 큰 사건이 생겼다.


아버지께서는 사우디 근로자[자동차 정비공]로 가신다 했기 때문이다.


열밤 정도 자면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2년이란 세월이 흐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린이에게 기약 없는 2년은 정말 긴 세월일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어린이는 아빠 없는 삶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사우디 가시기 전에 바나나를 어디서 구하셨는지


작업복에 3개나 소중히 품어서 가져다주셨다.


항상 소문으로만 듣던 그 귀한 바나나다.



11동 강훈이가 먹어봤다고 그렇게 자랑했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라고 했다.


이미 애들 사이에서는 바나나를 먹어본 자와 아직 못 먹어본 자로 나뉘었다.


물론 못 먹어 본 친구들이 훨씬 더 많았다.


먹어본 친구들이 아무리 맛을 설명해 줘도 정작 맛을 못 본 우리는 그 맛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안 됐다.



바나나 3개 중 2개는 형과 나 하나씩 그리고 마지막 1개는 할머니와 엄마가 반개씩 갈라 드셨다.


드디어 바나나를 받고 껍질을 조심히 까니 그 향기가 온 집안에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심히 한입 베어 먹었다


입안에 달콤한 부드러움이 잠시 스치더니 제멋대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으이그~ 아직 제대로 씹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억울했다..


그리고 두 입, 세입


첫 입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최대한 음미하며 맛을 보았다.


음......


맛은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호들갑 떨 만큼은 아니었다.


나에겐 바나나는 그냥 '달콤한 맛이 조금 있는 비싼 과일' 정도가 맞을 것이다.


'바나나킥' 과자가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려나~



하지만 이제 나는 바나나를 먹어본 자다.  


이 고급지고 비싼 걸 먹어봤으니 나도 그들과 함께 '바나나 엄청 맛있어' 라고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이렇게 젠체할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금세 다 먹은 우리는 하이에나처럼 엄마와 할머니 몫까지 탐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신 아버지가 사우디로 떠나시고


반의 반개 바나나를 드신 엄마는 우울증에 걸리셨다.....





[1분 BGM]  

https://youtube.com/clip/UgkxnevAxk_JrDqIwSDP3qMmm-ma5TgQKWIq?si=ROmLOBdT-pyiIs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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