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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숙 Jul 29. 2022

눈 떠보니 회사 앞

콜센터 10년 차의 출근 일기

기분 좋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설레는 비 오빠 목소리에 미소를 짓다가 정신을 차립니다. 아침 6시. 알람 소리가 아니라 전화벨 소리입니다. 아침잠 많은 딸이 지각할까 봐 결혼하고도 매일같이 전화하는 울 엄마 전화입니다. 맨날 피곤해하는 목소리로 전화받으면 엄마가 걱정할까 봐 눈을 더 부릅떠봅니다. 엄마 나 일어났어. 응 빨리 일어나자.





기분 좋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설레는 비 오빠 목소리에 미소를 짓다가 정신을 차립니다. 아침 7시. 이번엔 진짜 알람 소리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지 못하면 변덕쟁이 1호선이 또 연착될지 모릅니다. 운행을 안 할 수도 있다고요! 위기를 느낀 순간 오른쪽 귀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남편이 내 베개 위에서 자고 있습니다. 이 넓은 침대에서 둘은 구석에서 쪼그리고 자고 있었던 거지요. 제 인생 절반을 함께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매일매일 사랑스럽습니다. 자고 있는 얼굴에 뽀뽀하면서 놀아주고 싶지만 정신 차려야 합니다.







마스크 덕분에 화장은 패스, 선크림과 눈썹만 그리고 어젯밤 챙겨놓은 도시락을 냉장고에서 꺼냅니다. 결혼 5년 차이지만 요리는 아직도 못합니다. 주말에 엄마가 일주일 치 도시락 반찬과 남편 반찬까지 다 준비해 주십니다. 오늘 읽을 종이책과 함께 가방에 넣고 마스크를 씁니다.






방학역까지 걸어서 12분, 횡단보도는 2개. 부지런히 뛰고 걸어서 역에 도착합니다. 더워요. 저는 한겨울에도 덥습니다. 뚱뚱해서 땀이 많이 나는 건가 싶어 다이어트도 해봤지만 그냥 땀이 많은 거였어요. 남들보다 얇은 옷차림에 나 혼자 괜히 의식하면서 2-2 앞에 섭니다. 여기는 제가 내리는 역에서 계단과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계단을 내려가고 그 뒤에 여유롭게 내려가는 것이 좋아서 일부러 떨어진 곳에서 전철을 탑니다. 출근하면 정신없이 바쁠 텐데 급한 건 싫어요. 회사 밖에서라도 조금의 여유를 즐기고 싶습니다.






역시나 사람이 많아요. 앉을자리는 없고요. 가장 빨리 내릴 거 같은 분 앞에 서 봅니다. 항상 일찍 내리시던 그분은 안 보이네요. 블로그를 확인합니다. 전날 새롭게 달린 댓글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종이책을 꺼냅니다. 또 부지런히 읽어야 블로그에 서평 한 개라도 올릴 수 있지요. 의무감보다는 즐거워서 하는 거예요. 출근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해봅니다.







노량진역까지 몇 정거장 안 남겨놓고 제 앞에 분이 내렸어요. 오늘은 촉이 안 좋았네요. 일단 앉자마자 눈을 감습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노래를 들어요. 전철 안에서 푹 자게 되면 자꾸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서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든요. 그래도 귓속으로 스며드는 비 오빠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신나는 노래가 나올 때는 내적 댄스까지 추게 됩니다.






왼쪽 손목에서 진동이 느껴집니다. 워치가 용산역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자면 안 됩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실눈 사이로 한강이 보입니다.

노량진역에서 내리면 바로 회사가 보입니다. 입사하던 10년 전만 해도 노량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그 사이 양옆에 엄청 높은 빌딩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사이에 끼여있는 회사 건물이 힘들어도 퇴사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모습 같아 씁쓸하네요.






회사 1층 로비에서 체온 체크를 하고 여유롭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갑니다.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8시 25분. 오늘도 여유롭게 도착해서 마음도 여유롭습니다. 모니터 두 대에 회사 프로그램들을 실행해서 각 맞춰 나열합니다. 그리고 카누 한잔 타고 둥굴레차 물도 준비하고 전철에서 읽다만 종이책을 펼칩니다.






벌써 9시입니다. 이제 업무 시작해야 하는데 책을 덮을 수가 없어요. 조금만 더 읽고 싶은데 제 뒤로 센터장님이 지나가고 팀장님이 지나갑니다. 눈치 보여서 일단 덮습니다. 이번에는 휴대폰 거치대에 전자책을 실행해서 세워둡니다. 회사 프로그램이 저장되는 그 순간에 조금씩 읽다 보면 오늘 하루도 지나가겠죠. 정말 바쁠 때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귀를 머리카락으로 잘 가리고 비 오빠 노래를 듣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겠죠. 그런데 왜 아직도 3시인가요? 내일도 오늘 같은 하루가 반복되겠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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