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슬퍼할 권리

애도의 윤리에 대해-영화 <레인 오버 미>

by 사하

엠뷸런스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리며 도로를 지나갈 때, 뉴스에서 끔찍한 사고를 긴급 보도할 때,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상상해보곤 한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지고, 한편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그러한 상상을 했다는 것만으로 큰 벌을 받을 것만 같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가혹하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슬픔들이 돌부리처럼 널려있어서 때로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눈을 꾹 감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해버린다면, '그만 좀 하라'는 말로 슬픔을 묵살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굴어버린다면, 우리의 삶과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영화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2007)를 통해 애도하는 사회가 가져야 할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되어버린 슬픔


movie_imageUUNWL0TF.jpg 함께 게임을 하는 앨런(왼쪽)과 찰리(오른쪽)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진 앨런 존슨(돈 치들)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대학 시절 2년간 룸메이트였던 친구 찰리(아담 샌들러)를 발견하고 인사한다. 그러나 찰리는 앨런을 경계하며 묻는다.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야?"


찰리는 겨우 앨런을 알아보지만, 오랜만에 만난 찰리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찰리는 집에 오천 오백 개가 넘는 레코드를 모아 두고 주방을 끝없이 리모델링하며 새벽까지 게임에 중독되어 산다. 앨런은 찰리가 왜 변했는지를 알고 있다. 미국을 이전과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어놓은 사건, 9.11 테러로 찰리는 아내와 세 딸, 강아지까지 잃었기 때문이다.


상실의 경험은 찰리의 일상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 자체를 훼손한 듯하다. 나에겐 가족이 있었던 적 없다며 대뜸 화를 내고, 자신을 찾아온 장인과 장모에게서 도망치는 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포기한 사람 같다. 앨런의 부친상 소식에 찰리가 보인 반응은 그의 상태를 절실히 보여주는데, 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앨런에게 머뭇대다 '중국 음식이나 먹으러 가자'라고 말한다. 슬픔이 일상이 되어버릴 만큼 도무지 사라지지를 않아서, 차라리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말이다.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도망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제 곁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찰리의 마음은 상실의 무게를 절감하게 한다. 상실을 마주하는 일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과 같으니까, 슬픔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라도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다.


어떤 사건이란, 어떤 슬픔이란 그렇다. 이미 폭발하고 없어져버린 별이 내 눈에는 선명히 보이듯이, 분명히 일어났지만 나에게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나의 존엄성을 훼손할 정도로 끔찍하고 또 끔찍해서 남은 모든 생을 그 사건이 일어났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써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일따위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 미친 사회에서 그런 일들은 기어이 일어나고 말아서, 어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상을 빼앗기곤 한다.


일상이 사라지고서도 계속 살아가는 일은 가능할까. 무자비한 슬픔을 무방비로 맞닥뜨린 우리들은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다시 살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레인 오버 미,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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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은 찰리를 돕기 위해 정신과 상담의를 소개하기도 하고 그를 설득하기도 한다. 찰리는 어렵사리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앨런에게 들려주지만, 마주한 슬픔의 고통은 너무도 커서 집에 돌아가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총 안에는 총알이 없고, 경찰의 총에 맞기 위해 거리에 나가 미친 사람인 척 행동해 재판을 받게 된다. 억지로 기억을 마주하게 하는 강압적인 재판과 치료과정을 겪으며 찰리는 이제껏 피해왔던 장인과 장모를 마주해 말한다.


"얘기를 하거나 사진을 볼 필요도 없어요. 사실은 자꾸 본단 말이에요. 거리에서요. 거리를 걷다가 다른 사람들 얼굴 속에서도 식구들을 봐요. 두 분이 가진 어떤 사진보다도 더 선명하게요.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두 분은 서로가 있잖아요. 전 혼자서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봐야 해요. 어디를 가던지요. 하다못해 강아지도 봐요. 지나가는 셰퍼드도 망할 푸들로 보인다고요."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는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 대부분 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기를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한다. 지나간 일은 그만 잊고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요구는 찰리에게 어불성설이었을 테다. 그에게 상실의 경험은 '지나간 일'이 아니다. 현장성(現場性)을 가진,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과거가 아닌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자체인데 잊어버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에게 자주 '그만하라'라고 조언처럼 말한다. 실연한 사람이나 실패해서 좌절한 사람, 상실한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영역, 특히 슬픔의 영역에서 '그만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음은 이제부터 그만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타인의 마음에 관해 그만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더욱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죽이고, 끝내는 그 사람 자체를 죽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애도하는 우리가 상실을 다룰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찰리를 상담한 심리치료사 안젤라(리브 타일러)는 재판 과정에서 판사에게 찰리를 치료하는 것은 본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한 시간이 아닌, 찰리 본인의 시간으로. 그러다 보면 삶을 채워줄 사람들을 다시 찾을 거라고.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차츰차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시간이니까. 상실한 사람을 보채지 않고, 다만 그에게 기나긴 시간이 되어주는 일. 애도하는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다.



느리고 긴 시간으로,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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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 은숙은 전화를 걸어 광장 분수대의 물을 제발 꺼달라고 말한다. 전화를 받은 광주 도청 민원실의 직원은 건조하게 대꾸하지만, 은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욱 또렷이 말한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개개인에게 공평히 주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인간에게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할 기나긴 시간이 주어지기 위해선 그 시간을 함께 견디고 지지해줄 시스템과 문화가 필요하다. 슬픔을 묵살시킨 채 사람들을 일상으로 욱여넣는 공동체는 '발전한 국가', '첨단 미래'에 빠르게 다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더 나은 미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란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이니까. 살아내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들은 역사도, 미래도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4월이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울컥 목이 시려오는 것은 6년 전 4월을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당사자가 되지 않고선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무력해지는 슬픔이 이 세상에는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더딘 시간을 함께 살아내고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찰리의 곁에 앨런이 있었듯이, 앨런의 곁에 찰리가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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