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도와 슬픔, 그리고 사랑에대해-영화<알바트로스>

by 사하

1.중노동의 슬픔에 대하여


몇 년 전 대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유는 중노동입니다.” 사유 思惟. 생각하고 생각한다는 한자풀이처럼 무언가를 골똘히 헤아린다는 뜻이다. 복잡한 문제를 붙들고 몇 시간을 앉아있을 때 진이 다 빠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깊은 공감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선에서 이 말은 조금 다르게 적힐 수 있다. “슬픔은 중노동입니다.”

슬픔은 마음으로 하는 것, 사유는 머리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두 단어가 대치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감정(感情)에는 지적 활동이 수반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때 머리도 힘을 쓴다는 거다. 폭력범을 볼 때 느끼는 분노에는 사람은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인지가,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는 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맞이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슬퍼할 일’인지에 대한 판단 하에 슬픔을 느낀다. 그 판단은 주관에 따르는데, 이를테면 대부분에게 돌멩이를 잃어버리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지만(이 경우 돌멩이를 ‘잃어버린다’라는 표현조차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돌멩이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돈을 잃는 것만큼 슬픈 일일 테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만의 기준 속에서 슬퍼하기에, ‘내 일’이 아니라면 타인의 슬픔은 내게 슬픔이 아니다. 상대에게 아무리 소중한 존재였다고 해도 나에게 소중하지 않았다면 그 존재의 상실은 슬퍼할 일이 되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슬프지 않을 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상실이 결코 ‘나의 상실’은 아니기에, 그 부모가 느끼는 만큼의 슬픔을 느끼진 못한다. 아무리 선하다 일컬어지는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인간이라는 족속이 본래 그러하니까. 인간은 본래 타인의 거대한 슬픔보다 나의 작은 슬픔을 어여삐 여기도록 만들어진 존재니까.

타인의 슬픔에 대한 이 ‘존재의 한계’가 슬픔을 중노동의 사유(思惟)로 만든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이의 상황과 비애에 대한 끈질긴 관심과 이해의 시도, 상대의 입장에 자신을 세워보려는 아주 지적인 노동 끝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중노동을 반복하는 일은 힘들고 세상에는 진저리 칠 만큼의 비극과 비애가 도처에 깔려있기에 결국 우리는 슬퍼하기를 포기한다. 뉴스와 신문, SNS에는 온갖 억울함과 비통함이 넘쳐나지만 그저 혀를 차고 말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내 몫이 아닌 슬픔에 무뎌진다.



2.슬픔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가

KakaoTalk_20210729_141657096_03.jpg 다큐멘터리 영화 <알바트로스> 중 한 장면. 제작진은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새끼 알바트로스를 추모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을 먹고 죽어가는 새 '알바트로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나는 슬픔보다 먼저 권태를 느꼈다. 익숙한 비극이 지루하게까지 느껴졌다. 영화를 볼 때와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내 감정이 머릿속에서 훤히 그려졌다. 슬프고 괴롭겠지. 죄책감을 느낄 거고 마음이 아플 거다. 자아성찰을 하고, 약간의 성취감마저 느낄 거다. 그리고 잊어버릴 거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아니니까. 그 무식하고 무력한 슬픔을 무한히 반복하겠지. 그렇담 슬픔은 다 무슨 소용일까? 애써봤자 인간은 자신의 슬픔에만 진실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데, 중노동을 하면서까지 슬퍼해야 할 이유는 뭘까? 그 슬픔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주기에? 체념과 자조,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든 이름 모를 신을 향한 비난을 섞어 그렇게 질문하면서 영화를 틀었다.

영화는 예상대로 슬펐다. 어미가 어렵사리 구해온 먹이 안에 뒤섞인 플라스틱을 꿀꺽꿀꺽 삼켜낸 뒤 죽어간 새끼 알바트로스는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구한 얼굴로 카메라에 담겼다. 그런데 이 영화가 슬픔을 전달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영화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어떻게 수많은 새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보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어떤 삶을 사는지를 더 중점적으로 보여줬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두려움을 딛고 땅에서 바다까지의 장엄한 비행을 시도하는지. 그리고 영화는 하나의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알바트로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에 대해 설명하듯 영화는 알바트로스라는 낯선 생명체의 한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압도적으로 매력적인지, 얼마나 감탄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준 후에야, 그들의 절망과 비애를 그려낸다. 영화는 이 경이로운 새의 참담한 비극에 집중하는 일이 고통이나 자책, 죄책감의 감정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느껴야 할 감정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닌 ‘사랑’이라고 말한다.


“애도는 슬픔이나 절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과 같다. 애도는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혹은 이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도에 마음의 자리를 내어준다면 이는 우리를 사랑의 가장 깊은 곳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영화 <알바트로스> 중에서


죽은 알바트로스의 머리를 감싸고 오열하는 감독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모르는 더 높은 영역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슬퍼하기 이전에 우리는 사랑을 하니까.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의 슬픔에 닿고자,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몸을 낮게 구부리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슬픔이 무슨 소용이며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느냐는 나의 물음에는 이런 답을 할 수가 있겠다. 슬픔은 우리를 사랑으로 데려간다고. 내가 아닌 존재의 슬픔은 아무리 애써도 영영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유약한 우리들이지만, 용기 내서 슬퍼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영역의 사랑에 가닿을 수 있을 거라고.




3.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절망의 시대에 여리고 예리한 슬픔으로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간 윤동주 시인에게는 <팔복八福>이라는 시가 있다. 여덟 번의 시구가 반복되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팔복八福>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조그마한 벌레의 운명마저 슬퍼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의 말이기에, 마지막 시구는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여겨진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 함께 슬퍼합시다. 더욱더 많이 더욱더 깊이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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