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호 여행 ep1. 도야호 크루즈 + 함박스테이크 + 주판 여인
혼자 여행에서 새로운 길은 언제나 기대감과 설렘이 있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그곳에 어떻게 갈지, 가서 무엇을 할지, 어떤 맛과 멋을 즐길지 내 욕망에 따라 루트를 정하면 된다. 가족여행일 땐 얘기가 좀 다르다. 아이들 위주로 동선을 짜다 보니 여행 범주가 한정되어 비교적 단조롭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있지만 뒤로 소중히 미루어 둔다. 괜스레 시도했다 이도저도 아니게 서로 불만족스럽다. 날생선을 못 먹는 아이들을 데리고 굳이 초밥집에 가서 유부초밥을 주문하지 않고, 뜨거운 물에 오래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굳이 비싼 료칸 온천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떠난 삿포로 여행에서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아이들이 있으면 엄두도 못 내는, 완행버스로 산 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야 당도하는 도야호 온천행을 택했다.
산 위에 넓고 맑은 칼데라호가 있고, 호수 너머로 작은 후지산이라고 하는 요테이산이 웅장하게 ‘나 여기 있소’ 하고 떡 하니 서있는 도야 호수. 그 칼데라호를 주변으로 몇 개의 온천 리조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 중심을 조금 벗어나면 잔잔한 호수에 조각배가 듬성듬성 떠있는 아주 조용한 호수 온천 마을, 도야.
도야에 당도한 첫날. 눈이 지나간 자리 그대로 얼어붙어 군데군데 꽁꽁 언 눈이 보인다. 친절하게도 사람이 다니는 길은 깔끔히 치워진 배려 깊은 산책길. 어쩌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면 도야호 크루즈 매표소 앞이 잠시 잠깐 소란스럽다 이내 잦아드는 곳. 멀리 희뿌옇게 깔린 차가운 구름이 산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 있는 듯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고요하다. 그렇다고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지금의 내 정서와 맞닿아 있다.
오래된 크루즈, 조용한 식당, 주판을 튕기는 여인
시간과 공간에 여백이 있어 느릿느릿 천천히 거닐기 좋은 도야
호수를 가로지르는 크루즈를 타본다.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아니었으면 혼자 탔을 크루즈. 1, 2층으로 나눠져 있고 제법 크다. 크루즈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런! 어쩌나…’ 은하철도 999 배경음악이 내 머리속으로 켜진다. ‘기차가 어둠을 해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 모든 기물들이 옛 것 그대로다. 큰 홀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색 바랜 의자시트, 기름냄새 풀풀 나는 석유난로까지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간 기분. 재미있기도 하고 젊은이가 드문 산골짜기 시골마을의 ‘나이듦’이 삶의 속도를 아주 느리게, 느리게 흐르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속해 있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일상이 아닌 여행의 시간으로 반갑지만 한편으론 일평생 이렇게 더디 흐르는 시간속에 있다면 깜깜할 것 같다. 일순간 일상을 벗어나 느린 쉼을 위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지금의 내 시간이 소중하고 반갑다.
2층에 올라가니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많다. 효도관광까진 아니지만 연배가 있으신 분들. 혼자 왔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온 것 같다. 그들의 흥에 맞춰 사진도 찍고 주신 새우깡으로 갈매기에게 먹이도 줘본다. ‘일본 갈매기도 새우깡을 잘 먹네. 근데 새우깡은 한국에서부터 가져오신 건가?!’ 궁금했지만 묻진 못 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배에서 내려 내 길을 간다. 체크인까지 시간은 있고 배는 출출해 먹은 함박스테이크. 이곳도 고요한 도야호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내부 깊숙이 사람들은 있으나 모두들 조용히 식사한다. 있는듯 없는듯, 어쩌면 마스크가 필수인 코로나 여파인지도 모르겠다. 맛보단 마스크 피큐어들이 더 기억에 남는 집이다.
해 저물기 전까진 긴 시간, 케이블카를 타고 우스산에 오르고 싶지만 날이 흐려 호텔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로 나른한 오후 시간을 보내는 데 어디서 알이 튕기는 소리가 들린다. 내 눈을 의심했다. 주판을 튕기는 여인. 윗알과 아래알을 정렬하며 가로로 끗는 드르륵 소리, 탁! 탁! 탁! 숫자를 쳐내는 소리. 그녀는 영수증 하나하나를 들쳐가며 주판으로 셈하고 가계부를 적고 있었다. 30년전 초등학교 때 튕기던 주판을 이곳에서 보다니. 참으로 옛스럽다. 순간 좀 전에 탔던 은하철도 999 크루즈가 생각난다.
옛 것과 느림, 고요함과 조용함, 차분함, 여백이 있는 시간과 공간. 이것이 도야구나.
물건이든 사람이든 더디지만 그만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나를 두면 그게 ‘쉼’인 것 같다.
느린 시간 속에 나를 두는 곳, 도야. 자주 올 것 같다.
하늘이 기회를 준다면 주저말고 꼭 가야할 곳! 우스산
적당히 늦은 아침 조식당으로 가는 길. 복도 작은 틈으로 맑게 개인 파란 하늘과 어제 보지 못한 요테이 산이 보인다. ‘야호! 신난다! 남이 지어준 맛있는 밥 먹고 빨리 산에 가야지!’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번잡스럽지만 혼자인 나를 위한 자리를 잡는 데는 그리 어렵진 않다. 창가 자리! 요테이산이 더 웅장하게 내게 온다. 마음이 급하다. 예정된 기차시간도 미룬채 어떻게 내려올지 되돌아오는 길은 생각하지도 않고 우스산으로 향했다.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는 옛스런 도야호 크루즈
https://maps.app.goo.gl/bPMLRywFJ6SsRER89
함박스테이크 맛 보단 마스크 피규어가 인상 깊었던 점심
https://maps.app.goo.gl/au62ZYZD3jp8bWeE7
21세기에 주판 알을 튕기는 여인
https://maps.app.goo.gl/sd3EaNphamWsGgMGA
#퇴사 #혼자여행 #혼여 #아줌마_여행 #여자_혼자_여행 #엄마_혼자_여행 #홋카이도 #삿포로_근교 #도야 #도야호 #도야호수 #도야_크루즈 #도야_카페 #도야_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