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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30. 2020

그래도 어쩌면 도움이 필요해

정신과에 가다




결혼을 하고, 퇴사를 하고, 반려묘를 들였다. 남편과도, 카레와도 과도기를 지나 서로에게 완전히 적응해나갔고 나는 점점 더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나의 '예민함'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좋은 점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안정감도 새로운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아예 막지는 못했다. 생리 전 우울해지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여전했고, 작은 걱정거리라도 생기면 나는 또 여전히 불안정한 나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하는 날로부터의 나는 늘 불안했고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채워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이것만 하면 다 잘 될 거야. 딱 이것만 채워지면 정말 행복해질 거야.’ 그렇게 눈 앞의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질주하다 성공하면 그 성취감에 짧은 만족을 맛보았고 실패하면 좌절감에 지하 저 아래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눈 앞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해도 기대처럼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가면 인생이 술술 풀릴 거라고 생각했고, 대학교 때는 취업에 목숨을 걸었다. 결국 내가 원하던 회사에 합격했지만 더 큰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매일 같은 야근. 쉼 없이 새벽까지 일하다 4시간 후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도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선배들을 보면 내 미래가 그려졌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고 몸과 마음은 모두 무너져가고 있었다. 1년 후, 2년 후, 5년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보내며 나는 10kg 이상의 살을 얻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했던 나는 살만 빼면 행복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몇 년에 걸쳐 그 살을 다 빼고 아예 마른 몸이 되고 나서도 나는 별로 행복해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 또 다른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괴롭혔다. 절대 끝나지 않는 굴레였다.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쫓는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지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분명 행복해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일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다. 무언가를 가진다고 한들, 내가 처한 환경이 바뀐다고 한들, 내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완벽하게 행복해질 일은 없다는 것을. 그 속에 있는 내가 그대로인데 어떻게 상황이 변한다고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까? 이렇게 단순한 진리인데,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나는 아직도 종종 이런 착각을 한다.


인생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발단과 전개로 시작해 위기와 절정을 거쳐 결국 해피엔딩, 또는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인생은 없다. 늘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는 게 삶이다. 힘든 일도, 기분 나쁜 일도, 걱정되는 일들도,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가져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처한 환경이 좋아져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서른 해 동안 혼자서 견뎌 왔으니 어쩌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자꾸 찾아오는 불안감이 내 남은 인생까지도 좌지우지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당시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엄청나게 우울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이틀 동안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후 결국 나는 무심코 정신과를 찾았다. 사실 몇 년간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용기가 나지도 않았고, 나의 이런 우울과 불안 증세는 심해졌다가도 며칠이면 또 괜찮아지는 것 같았기에 늘 그냥 넘겨 버렸던 일이었다. 이번 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왔던 나는 반복되는 패턴에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언제 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이제라도 나는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간단한 검사와 상담 후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은 더 심한 불안 증세를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부교감신경 그래프는 맨 끝까지 치솟아 있었고, 교감신경은 반대로 맨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의사는 내게 물었다. “혹시 술을 많이 하시나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거의 안 먹는데요, 가끔 친구들 만날 때만 좀 먹는데...” 의사는 정말이냐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보통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결과가 나오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심한 경우는 많이 없다고 했다. 지금 불안이 너무 치솟은 상태라 우울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하루 세 번 먹을 약을 처방받았고 필요한 경우 추가로 복용할 수면제까지 받아왔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도 며칠은 차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안다. 내 인생에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것을.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하루 만에 내 인생이 180도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을. 결혼을 한다고, 퇴사를 한다고, 반려묘를 입양한다고 해서 내가 하루아침에 완벽하게 행복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나는 매주 정신과를 찾아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후련할 때도 있었지만 간혹 안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니 오히려 더 기분이 다운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자리를 찾아갔다. 지금은 정신과를 다닌 지 네 달이 되었고, 격주로 병원에 방문하고 있다. 이제는 하루 한 번, 자기 전에만 약을 먹고 있는데 이전보다 훨씬 걱정과 불안이 줄어들었다.


우울이나 불안은 사실 마음가짐이나 의지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감정, 기분, 수면 등의 조절을 돕는 뇌 호르몬 '세로토닌' 분비에 이상이 생겨 나타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약으로 세로토닌 분비를 조금만 도와주어도 많은 도움이 된다. 나 또한 세로토닌 흡수를 도와주는 강하지 않은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꾸준히 복용하니 나를 늘 괴롭혀 왔던 소화불량도 많이 좋아졌고, 평소 이유 없이 찾아오는 무기력함이나 우울감이 많이 개선되었다. 일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줄어들고,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비용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한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전혀 부담되지 않는 비용이다. 나의 경우 초진 시 4만 원가량의 비용을 지불했고 그 이후에는 매 번 만 원대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현재는 약값까지 모두 포함해 매달 총 3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혹시라도 예민한 성향 때문에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고 있다면, 주저 없이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내 의지가 약해서, 마음가짐이 부족해서 이런 것이라고 자책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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