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내가 떠났다. 1톤 트럭에 짐을 싣고 웃으며 떠나갔다. 나는 아내가 떠나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아내가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에는 파리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샀던 생제르망 후드티도 있었고, 함께 입으려고 산 커플 츄리닝, 그리고 아내가 늘 악기케이스에 붙이고 다녔던 내 증명사진이 있었다. 아내는 이제 나와 관련된 모든 걸 지우고 싶은 걸까?
나는 아내가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어느 날부턴가 밥을 잘 먹지 못했다.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힘들어했고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고, 정신과 상담도 받아봤지만 무엇이 아내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 사이가 지금 하고는 많이 달라질 거야.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들어볼래?"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뭘까… 겁이 났지만, 듣지 않을순 없었다. 결국 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아내는 그동안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과는 일 년 정도를 만났고, 몇 달 전에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밥도 잘 먹지 못하고 힘들었던 이유는, 그 사람과 관계가 끝나면서 생긴 상실감과 공허함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죄책감 때문에 많이 괴로웠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아내의 외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그 사실을 맞닥들였고 큰 충격에 빠졌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 나는 문제해결을 선택했다.
“그래,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어. 이제 다 끝난 거라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면 되는 거야. 이 이야기는 내가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을 테니까 당신도 가족들한테 얘기하지 말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우리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집중하자.”
정말 그렇게 믿고 싶었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난 아내를 용서하기로 다짐했다.
그때 난 내가 감당해야 할 용서의 무게를 잘 알지 못했다. 아내의 외도를 용서해 주겠다고 말 한 이후로, 나는 별안간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불편해졌다. 반면 아내는 편안해 보였다.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나에게 옮겨 주고는 홀가분해하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이 괴로웠지만 이 충격적인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아내는 정말 나에게 미안하기는 한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지? 그런 마음이 들자, 나는 아내의 진정성을 을 의심하게 되었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행동이 내가 원하는 정도로 충분히 책임감 있게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아내를 의심하고 또 외도가 끝났다고 한 아내의 말도 의심하게 되었다. 아내는 점점 나의 간섭과 의심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리고 혼자 바람을 쐬러 다녀오겠다며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여행을 가버린 아내를 보면서, 나는 그동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나는 아내가 그놈이랑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증거는 없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혼자 여행을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화가 나서 장모님에게 연락을 했고, 지금 ~이런 상황이니 장모님이 좀 나서서 아내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아내를 앉혀놓고 장모님 앞에서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그놈이랑 있었던 건 아닌지 취조하듯 따져 물었다. 그동안 나 몰래 외도를 하며 있었던 일도 전부 다 털어놓게 만들었다. 아내는 순순히 모든 걸 이야기 했고, 이제 다시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다음날, 아내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왜 죄 없는 우리 엄마까지 죄인 취급을 하고, 거기 앉아서 그 이야기를 다 듣게 만들어? 우리 엄만 잘못한 거 없잖아”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후회가 됐다. 모든 걸 묻고 다시 잘 지내보자고 했으면서, 용서하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아무것도 용서하지 못했구나. 이렇게 되어버린 건 누구의 잘못인걸까.
아내는 내게 이혼하자고 말했다. 바람을 피운건 자기가 잘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나랑은 더 이상 못 살겠다며… 이미 바람을 피우기 오래전부터 나를 남자로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가 버렸다.
아내는 그렇게 1톤 트럭에 짐을 싣고 나를 떠났다. 나는 아내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아내는 나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나는 떠나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