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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Oct 04. 2022

내가 버거를 사랑하는 이유

Burger & Life

MBTI가 유행하기 몇 년 전에 회사 팀 워크숍으로 버크만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버크만 진단은 흥미, 욕구, 평상시의 행동, 스트레스 상황, 총 4가지 분야에 대한 사람의 행동이 적힌 카드 뭉치를 두고 시작한다. 타깃으로 선정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 카드 중에서 그 사람에 해당하는 카드들을 고르고, 마지막에 강사가 종합적으로 해석해주는 일종의 성격 테스트다. 


선택된 카드를 한데 모으면 정작 카드에 적힌 내용이 아니라 카드 뒷면의 색깔의 수를 기록해서 진단을 한다. 카드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총 네 가지 색깔이며, 모든 색깔이 큰 차이 없이 골고루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두 가지 색깔이 극단적으로 많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대부분이 녹색 카드였다.


"보통 녹색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이건 거의 감정이 없는 로봇이나 이렇게 나오거든요"


강사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내심 뜨끔했다. 불과 며칠 전 회의 중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모여있는 거냐"라는 얘기를 동료들 사이에서 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에서는 ENTJ가 나왔다. 몇 번을 해도 ENTJ다. 나의 버크만 진단과 MBTI 결과의 공통점이 있다. 검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케이스 중에 통계적으로 가장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다는 점이다. ENTJ의 설명을 보면, 카리스마, 통솔력, 단호함, 자기 관리능력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열정이 많으며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정확히 나에 대한 설명이다.


스스로를 설명해보자면, 나는 해답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 같이 모인 회의 해서 "~ 인 것 같아요" 나 "~ 했으면 좋겠어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료를 보고 있으면 물 없이 고구마를 먹을 때처럼 가슴 한쪽이 답답해진다. 속마음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애매하게 전달한다. 이건 해답이 아니다. "이건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잘못되었다."라고 해야 해답이다. 


이런 성격은 아마도 자라면서 그런 걸 누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흥부놀부전 인형극을 보여주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는데, 담임이 매우 걱정스러운 어조로 집에 전화를 했단다. 50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 유일하게 나만 흥부에 대한 욕을 써놨다는 거다. 능력도 없는 놈이 애는 많이도 나아서 어쩌고 저쩌고 하고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사실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자라면서 나는 세상을 흑백으로 보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 해답이나 질서 같은 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아버지와 마음 놓고 방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절에서 숨어 지내다시피 살던 나로서는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없었기에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고 했고, 바깥 세상은 내가 갈망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거다. 물론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는 질서나 정답 같은 것들은 우리가 정한 것일 뿐 불변도 아니고 영구적이지도 않다. 설령 세상에 질서란 게 있다고 해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게 버거랑 뭔 상관이냐고? 버거는 음식 중에 가장 질서가 분명한 음식이다. 버거의 질서는 눈에 보인다. 속재료가 원형을 거의 유지한 채로 노출된 버거는, 안에 뭐가 들어갔는지 무슨 맛인지 먹기 전에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재료나 쌓는다고 다 버거는 아니다. 첫 회사를 다닐 때, 사내 커플로 결혼한 부부의 신혼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이 친구는 나의 취향을 고려해 아침부터 분주히 버거를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먹은 건 버거가 아니었다. 자른 모닝 빵 사이에 야채와 무언가 치킨 가라아게 같은 것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패티도 없었다. 나는 음식을 먹자마자 "음... 이건 버거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친구는 지금도 만나면 그 사실로 나를 타박한다.


2019년 구글의 버거 이모지 사건을 기억하는가? 구글폰의 버거 이모지에 치즈를 패티 밑에 깔았다는 이유만으로 구글 CEO가 공개적으로 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 우리 팀 동료들도 나를 보자마자 이게 이상한 거냐고 물어봤지만, 이상한 게 맞다. 아무리 버거가 패스트푸드라고 해도 질서가 분명한 음식이다. 치즈는 절대로 패티 아래로 가서는 안되며, 야채는 무조건 치즈 위로 가야 한다. 소스가 들어가는 경우, 빵의 윗부분에만 묻어야 한다. 아래쪽 빵에는 고깃기름 외에는 절대로 어떠한 소스도 묻어선 안된다. 내가 롯데리아를 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이스 버거, 김치 버거, 강정 버거, 라면 버거 등등 근본도 없는 버거를 만들곤 한다.


버거의 이런 점이 해답과 질서를 갈망하는 나에게 딱이다. 돌이켜 보면 이런 내 성향이 직업선택에도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개발자란 게 결국 코드로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해답을 찾는 일이다. 결국 나는 회사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고 퇴근하면 버거를 먹으며 영혼의 안식을 얻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성공한 덕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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