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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Oct 16. 2024

그래서 우리는 웃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이를 먹으면서 곤란한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 그중 하나가 건망증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십이 넘으니 몸 구석구석에서 아우성을 친다. 이제 정말 나이 들어간다고, 살살 살아가자고.     


오랜만에 남편이랑 마트에서 장을 봤다. 아이들은 저마다 기숙사에서 지내고, 둘이 살다 보니 마트에 갈 일이 별로 없다. 집에 오자마자 쌈 거리와 양파절임을 꺼내놓고 삼겹살을 구워서 열심히 남의 살을 뜯으며 맥주도 한 잔 시원하게 마셨다.     


자꾸 살이 붙어 걷기도 힘들다며, 남편이 오늘은 일 절만 하잔다. 오른 흥을 간신히 재우며 한 잔으로 끝냈다. 설거지를 마치고 정리하는데, 남편이 낚시점에 간다며 집을 나서려 했다. 배가 부르던 참에 잘 되었다고 나도 따라나섰다.      


봄바람이 생각보다 거세게 불었다. 옷깃을 여미고 신발 끈을 꽉 조여 맸다. 배가 부르니 우선 걷기로 했다. 애들이 어떻고, 날씨가 또 어떻고, 우리는 걸을 때 수다를 참 많이도 떤다. 사실 내가 훨씬 더 말을 많이 한다. 남편은 날마다 반복되는 내 얘기를 잘도 들어준다. 남편은 정말이지 잘 얻은 것 같다.     


땀이 나도록 30여 분을 열심히 걸었다. 이제 버스를 타볼까, 마음먹자마자 낚시점 가는 버스가 쌩하니 우리를 지나쳐 갔다. 아쉽지만 걷는 김에 조금 더 가보자고 서로 다독인다, 걸어온 만큼만 더 걸으면 된다고.  

    

지하철 역사 뒤쪽으로 철로가 내려다보였다. ‘고압전기가 흐르니 감전에 주의하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지만 난 자꾸만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처럼, 안전 불감증이 치솟았다. 술은 역시 위험한 물건이다. 마누라가 사고를 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남편이 나를 끌어당긴다. 호기심을 내려놓고 남편과 다시 손을 잡고 걷는다.     


 다리가 뻐근해질 무렵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는 걷는 것도 무리하면 안 된다. 남편은 큰 길가에 있는 낚시점에 들어갔다가 찾는 게 없다고 바로 나왔다. 그 주변에는 낚시점이 많다. 주인장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갖추고 있는 제품이 다르다. 우리는 길 건너에 있는 다른 낚시점으로 들어갔다.   

   

낚시점에 가면 알록달록 화려한 물건들이 참 많다. 전부 캄캄한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들이다. 신기한 물건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문득 걱정이 든다. ‘저 많은 것들이 다 바다에 버려지면 어쩌지?’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는데 언제까지 그 놀이를 즐길 수 있으려나.     

 

아무튼 남편은 원하던 것은 구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확이 있었나 보다. 힘들게 걸은 게 헛수고는 아니라니 다행이다.     

낚시점까지 쉬지 않고, 한 시간여를 걸었더니 다리가 뻐근하다. 집에 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이 코 앞인데 집까지 가는 버스가 우리를 지나친다. ‘오늘은 안되나 보다’고 실망감에 주저앉으려는데, 마을버스가 왔다. 한 번 갈아 타야 하지만 다리가 아프니 덥석 올라탔다.     


집을 나설 때, 남편이 교통카드를 깜빡했다길래 내 것으로 함께 쓰자고 했다. 버스에 타려는데 남편이 교통카드를 먼저 찍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그래진 눈을 하고 뒤따라 앉는 나에게 남편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설명해 주었다. 겉옷 윗주머니에 단단하게 만져지는 게 있어 꺼내 보니 교통카드였단다.    

  

남편은 통근버스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교통카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분명히 회사 말고 어딘가에 갔던 거다. 이주 전에 둘이 같이 냉면을 먹으러 갈 때 썼던 건가 했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빨래를 안 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남편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쉰다. 이젠 어제 일도 기억 못 한다며, 정말 늙었나 보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났다. 월요일은 우리 ‘결혼기념일’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고, 전망도 좋고, 맛도 좋다는 쿠바식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밥값으로 둘이 10만 원을 넘게 쓰고도 웃고, 호수공원을 걸으면서는 ‘이 동네 좋다!’고 웃고, 레드제플린 음악 주점에서는 ‘wonderful tonight'를 들으면서 연방 건배를 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깡그리 잊어버렸나 보다.     


예전엔 이런 일이 있으면 늙어 버렸다고 많이 속상해했다. 어떻게 그런 걸 잊어버리냐고, 화를 내면서 서로 탓하고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그 추억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깔깔대고 웃으니, 남편도 덩달아 웃었다. 남편은 너무 꿈같은 시간이어서 잊은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니 잊어버리는 일이 많다. 지갑이나 핸드폰을 두고 나와서 곤란할 때가 종종 있다. 공과금을 깜박해서 연체료를 물은 적도 있다. 하지만 간밤에 남편과 언성을 높이면서 싸워 놓고는, 다음 날 아침에 아무렇지 않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누가 나에게 돈을 빌려 가도 큰돈이 아니면 갚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한다. 예민했던 내가 깜박깜박하면서 둥글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망각은 고통이 아니라 신이 준 선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웃었다!




https://youtu.be/UprwkbzUX6g?si=b5e_UQu4EsRI8S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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