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만 번, 4초에 한 번꼴이란다. 평균나이가 83세인걸 고려하면 일평생 약 6억 5천만 번 쉰 후에 숨을 거둔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영원히 쉴 것 같았는데 숫자로 표현하니 숨이란 것도 결국 제 몫을 다하면 꺼지는 배터리와 다를 바 없구나 싶다.
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딱히 재 본 적은 없지만, 추억을 더듬어 보니 단서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한창 도미노가 유행했다. 주말이면 티비에서 도미노 시합을 보여줬다. 수십 명의 사람이 한 팀을 이뤄 수천수만 개의 도미노를 세우는 게 장관이었다. 각 블록이 쓰러지면서 멋진 그림이 만들어 지면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와!"하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문방구에 도미노가 있길래 엄마에게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박스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가장 작은 박스로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상자를 뜯었다. 1g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부실하고 촌스러운 색감의 직사각형 블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블록을 하나씩 세웠다. 마루 이쪽 끝에서 쓰러지기 시작해서 반대편까지 간 블록들이 다시 방향을 틀어 마루 한가운데로 향하고, 그곳에서 ‘엄마 사랑해요’라는 글씨가 만들어지며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멋진 상상이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쓰러질까 봐 덤불 뒤에 숨어 있는 사냥꾼처럼 조심조심 숨을 쉬면서 도미노를 쌓아갔다. 20개 정도 세웠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후' 하고 숨이 새어 나왔다. 그 작은 숨에 도미노는 차르륵 쓰러져버렸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실패했다. 이러다가는 ‘엄마 사랑해요’는 고사하고 마루 횡단조차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매번 그놈의 작은 숨이 문제였다.
얼마 후 친구 집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실은 내 도미노가 너무 작고 가벼웠던 탓이었다.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친구의 도미노는 색깔도 고급스럽고 무게도 제법 나갔다. 나의 작은 숨 따위는 보란 듯 튕겨내는 위풍당당한 블록들이 내 상상 속의 도면을 따라 하나씩 바닥에 세워질 때의 그 기쁨이란. 남의 집이라 차마 '엄마 사랑해요'라고 쓰진 못했지만 난생처음으로 마루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길게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아, 그러니까 내 숨의 무게는 딱 그 중간 즈음이다. 싸구려 도미노보다는 무겁고 값비싼 도미노보다는 가벼운.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도미노 할 나이는 지났고 생일 촛불을 먼저 끄려고 목숨 걸지도 않는다. 한창 담배 피울 때는 조금만 운동해도 금방 숨이 찼는데 금연한 지 10년이 되니 25m 길이 수영장 한두 번 정도는 거뜬하다. 딱히 숨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숨 쉬고 사는지도 몰랐다. 의식을 안 하니 귀한지도 몰랐다. 그러다 잊을 수 없는 몇몇 사건을 겪고 나는 다시 숨을 생각하게 됐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살아있는 것은 숨을 쉰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했던 바다를 순식간에 찢고 나와 물줄기를 하늘 높이 뿌려대는 거대한 고래도 숨을 쉰다. 기척도 없이 갈라진 벽 틈으로 스며드는 한낮의 그림자처럼 내 뒤를 휙 스쳐 지나가는 까만 길고양이도 숨을 쉰다. 양팔을 벌려 둘레를 재지 않는 한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은행나무도, 카메라 렌즈에 잘 포착되지 않는 얇디얇은 방사형 덫을 펼쳐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손톱만 한 거미도 숨을 쉰다. 나도 당신도 숨을 쉰다.
숨에는 종류가 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한 숨이 있는가 하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숨이 있다. 심연에 닿을 정도로 깊고 무거운 숨이 있고, 마당에 이는 작은 회오리바람에도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숨도 있다. 잠든 아이의 코에서 쌕쌕 새어 나오는 숨이 있는가 하면, 성나서 씩씩대는 숨도 있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내쉬는 부드러운 숨이 있고, 결기를 다지기 위해 세차게 내뱉는 숨도 있다.
방법도 다양하다. 지각해서 뛰어갈 때는 헐떡이면서 쉬고, 한밤중에 조용히 책을 볼 때는 잔잔하게 쉰다. 아이의 막대풍선을 불어줄 때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힘껏 내쉬기도 하고, 수영장에서 잠수 놀이를 할 때면 인생 마지막 숨인 것처럼 크게 들이마시기도 한다. 무거운 짐을 들 때는 '흐읍'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고,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나오면 '하아'하고 숨을 내쉰다.
오늘도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다양한 사건을 만날 것이다. 모든 순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랬던 적도 없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내 인생은 이렇게 되리라 하고 그렸던 그림이 있다. 도미노를 하기 전에 먼저 상상으로 도면을 그렸던 것처럼.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결코 내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때로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았고,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 쉬는 한 기회는 언제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래왔으니.
숨에는 생명이 있고 종류가 있고 방법이 있다. 그리고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숨을 쉬는 한 우리에겐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