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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r 01. 2023

04 사랑이라는 찰나




 정말 힘든 날이었다. 큰 회사로 이직했다는 자부심이 무색할 만큼 그냥 편한 회사를 더 다녔어야 했나 후회만 가득하던 날이었다. 예고 없이 날아오는 날 선 말들에 너덜너덜해져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퇴근을 10분 앞두고 있었고 마침 당신에게서 연락이 왔다.


 '퇴근하고 당산동 1가 358-A 여기로 와'


 요 근래 회사 일에 치여 몸도 마음도 힘들다고 자주 하소연을 했던 터라 당신은 긴 말하지 않아도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알려준 주소 근처에 다 달으니 그곳이 즉석떡볶이 가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소울푸드. 떡볶이. 그중에서도 팔팔 끓여 먹는 즉석떡볶이는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줄 구세주임이 틀림없었고 당신의 멋진 메뉴 초이스에 하루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게 문을 열자 이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여 떡볶이를 요리조리 잘 젓고 있던 당신은 뒤늦게 날 발견하곤 해맑게 손 인사를 했다. 옆에 자리하자 생맥주 두 잔이 기다린 듯 바로 테이블 위로 올려졌고 이 대목에서도 당신의 센스에 감탄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맥주는 힘겨운 하루를 잊게 해 주었고 당신의 예쁜 마음이 담겨 더욱 달달하게 넘어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떤 마음인지 당신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빈 그릇에 맛있게 익은 떡볶이를 한가득 덜어주고는 '많이 먹어. 오늘도 수고했어'라며 고마운 말마저 잊지 않고 해 주었다.


 내게 사랑은 딱 그러한 순간들의 교집합이다. 구구절절 많은 대화들이 오가지 않아도 상대의 상태와 마음을 고요히 알아채 군불처럼 데워주는. 그러한 사랑스러운 순간들.


 배가 남산이 되어 가게를 나오니 라일락향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배가 부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아름답게 보였고 따스한 당신 손에 괜스레 설레던 날로 기억한다. 사랑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 어느 지점에 멈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사랑이란 감정이 차올랐던 찰나들은 내 날것의 마음을 따스히 포용받는 날들로 채워졌다.


 가끔 그 가게 근처로 약속이 있어 지나칠 때면 라일락 나무는 여전히 작은 골목 귀퉁이에서 날 반겨주었고 떡볶이 가게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당신과 나의 추억도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까 문득 고민이 든다면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보자. 힘든 하루를 보냈다면 상황에 맞는 조언을 잠시 미루고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보고, 서운함을 토로하면 아무 말 없이 먼저 끌어안아주자.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사실 사소한 일상에서 피어나기에 근사한 선물보다 더 값진 마음에 삽시간 사랑의 질량이 거대해질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나와 당신의 사랑은 끝나 우리가 아닌 서로가 되었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들은 고맙게도 그때의 우리를 놓지 않고 붙잡아준다. 이따금씩 떠올려준다. 나는 당신 덕분에 힘든 누군가를 위로하는 법을 배웠고 한마디 말없이 사랑을 전하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물론 우습게 들리겠지만 종종 회사에서 지친 날엔 당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절대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랑이란 얄팍하고도 거대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비록 그 과정에서 부서지고 무너짐을 반복하더라도 우리는 안다. 사랑은 결국 부서진 잔해 속에서 찾아내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소중한 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 줬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참 소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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