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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만다 Mar 27. 2018

우울감을 야기한 5가지 이유ㅠㅠ

거의 한달만에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놨습니다

오늘 근 한 달 만에 '정신’을 차렸다. 지난 2월 말부터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우울감을 겪었다. 지난 2016년 말에 겪었던 기분과도 매우 유사했다. 글을 업으로 삼고 있지, 줄곧 노래를 불러온 인공지능만 파고 있지그렇게 소원이라던 독립도 성취했지, 사내정치로 눈치싸움 볼 필요도 없지. 훨씬 더 나은 조건에서 생활하는 상황에서도 뭔가 공허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계속 잠만 잤다. 평일에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지속했다. 회사-집-회사-집 외에는 밖에 잘 나다니질 않았다. 어느 새부턴가 청소나 설거지도 손을 놓기 시작했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무엇인가 계속 읽거나, 보거나, 잠자거나, 늘 셋 중 하나인 상태였다. 좋은 자세로 취침하기도 거부했다. 틈틈이 정리해야 하는 냉장고도 애써 무시했다.  


어떤 유형의 외로움이 나를 압도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생각과 방황 끝에 드디어 나는 그 원인을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엄마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본가에 살 때는 엄마가 사다 놓은 제철 과일을 제때에 먹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싱싱하고도 맛난 음식으로 식사하기도 했다. 지금 혼자 사는 나로서 최선은 냉동 블루베리와 냉동 딸기를 먹는 것뿐이다. 일전에 욕심부려서 사둔 사과, 레몬, 깻잎, 양상추 등 과일과 채소는 다 먹지 못하고 다 내다 버렸다. 나 말고 먹을 사람도 없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신선한 과일과 맛난 한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다. 잔병치레가 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늘어진다. 그러면 잔다. 음식을 대충 해 먹는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무른다. 냉장고를 외면한다. 물러가는 채소와 야채의 기운이 나를 압도한다. 그리고 다시 신선한 과일과 맛난 한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첫 번째로 돌아간다. 


두 번째, 카페 비용을 줄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전세자금대출 원금을 빠르게 갚아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11월, 12월 생애 첫 독립으로 사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지출이 늘어난 것도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강박에 영향을 미쳤다. 서울-판교 또는 판교-집 신분당선 전철 이용비용도 무시 못 했다. 그 밖의 각종 공과금까지 충당해야 하다 보니, 이자까지 합치면 대략 월 35만원을 추가 지출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줄일 수 있는 부분부터 줄여나갔다. 바로 그 항목은 카페 이용비였다. 집에서 작업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는 걸 이유로 들먹거렸다. 그렇지만 주말에도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글을 쓰는 일은 습관의 영역을 벗어난 행위다. "창살 없는 감옥." 그게 딱 적합한 단어다.  


세 번째, 관계의 공허함이다. 지금까지 기자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날 찾아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기자라는 타이틀을 벗고 나니 관계의 공허함을 더 느낀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말 기자로서 다가갔구나, 일 잘했네?'라고 생각하고 싶다가도, 결국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던 건 기자라는 그 타이틀 하나였다는 생각에 괜스레 침울해지곤 한다. 카카오톡 친구목록을 보면 그 상념은 더욱 깊어진다. 조금이라도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오로지 나만의 착각이었나, 아니면 기자-취재원의 관계를 벗어나 더 진솔한 관계를 맺지 못한 내 한계를 인정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결국 기자와 취재원의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게 맞는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때처럼 사람들이 먼저 다가오질 않는다. 보도자료 게재 요청, 인터뷰 요청, 만남 주선 요청. 그런 목적으로 만남들이 성사되어온 건가, 침울하다.


네번째, 일적인 외로움이다. SNS를 통해 간간이 언급한 적이 있다. 일하는 데 정말 외롭다고. 예전에는 기자 선배와 동기들이 힘이 돼 주었다.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고민이 되면 같은 곳을 출입하는 선배들을 찾아갔다. 회사, 집단 문제로 힘들어할 때는 동기들이 힘이 돼 주었다. 고민이 있으면, 그 고민을 같이 나눠줄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같이 술 한잔할 사람들도 늘 곁에 있었다. 그게 우리만의 스트레스 또는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언제나 고민을 나눌 집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도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누군가와 고민을 나눈다는 게 사실상 힘들다. 연구원을 붙잡고 기술에 관한 설명을 들을 기회를 갖춘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임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내가 연구원들의 연구노고를 제대로 이해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내 일을 잘 모르는 거라 위안한다. 그런데 그들에겐 같은 목적의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또다른 연구원이 있지만, 내겐 없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부분에서 가장 큰 공허함을 느낀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드는 단상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고, 서로가 가진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그 과정 자체가 얼마나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는 나와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도 안다. 복에 겨운 소리 나발이다. 다만, 아직도 홀로서기를 할 자격와 능력이 있는지, 한켠으로는 의구심도 품는다. 아집과 편견만 키워나가는 건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아직도 선배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넌 주니어야. 니가 뭘 알아서 해. 넌 항상 내게 보고하고 허락맡고 해야해!" 


다섯 번째, 오프라인-온라인에 서식하는 개저씨들이다. 하지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괴롭힌다. 대화 속 맥락을 읽지 못하는 건 기본템이다. 남에게 약점이거나 단점이 될만한 것들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간다. 농담인 것 마냥, 굳지 하지 않아도 좋을 말만 골라서 한다. 그 자리에서 똑 부러지게 대처하면 좋은데, 항상 잠자리에서 혼자 뒷북을 친다. 그때 왜 그렇게 대처하지 못했지, 혼자 생각하다가 울화통을 터뜨릴 때가 더 많다. 언제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내게 두 번이나 똑같은 실수를 했다.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는데, 두 번째는 실수가 아닌 것 같아서 '사과하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는 그렇게 말한 게 기억나질 않는다고 했다. 왜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고까지 했다. 미투 운동을 벌이는 여성들의 참지 못할 울분을 조금이라도 느꼈다고 해야 할까. 그때 느꼈다. 이 사람들에겐 그런 대화 방식은 습관이구나, 그렇게 남의 꼬투리를 잡아서 말하는 건 반사신경적으로 나오는 행동이구나.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로 정신이 무너지니 육체가 무너지고, 육체가 무너지니 정신이 더 무너졌다. 무한 무너짐의 반복을 근 한 달간 계속 느꼈다. 그러다가 오늘 회사 사람들과 밥을 먹는 도중에 '우울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다.(물론,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우울하다는 감정은 육체로부터 비롯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몸이 늘어지거나 피곤하면 기분도 울적해지고 그러더라고요. 그럴수록 저는 더 몸을 기운차게 만들려고 노력해요" 

정신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육체마저도 제 소임을 하지 않도록 방임했구나, 아차 싶었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불구, 타인이 지적하니 방황의 핵심이 보였다. 그날로 나는 집에 와서 어제 청소하다 말은 집을 깨끗하게 치웠다. 근 한 달 만에 깨끗한 집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집 야경 뷰입니다 :)


첫 독립, 탈 기자, 첫 대출, 계란 한판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겪다보니 정신적으로 많이 소모됐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몇가지 해결책을 찾았다. 


첫번째, 주말마다 카페에 가서 신선한 과일/채소 샐러드를 먹기. 그리고 창밖 풍경을 보면서 공상하기. 

두번째, 개저씨들이 뭔가 거슬리는 말을 하면 그자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워딩에 대해 정정 요청하기. 혹은 발뺌을 방지해 녹음하는 습관 들이기. 

세번째, 아무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고 힘들더라도 설거지통에 설거지 쌓아 놓지 않기. 설거지하기 전에 새로운 식기 꺼내놓지 않기. 


관계의 공허함이나 업무적 외로움은 솔직히 아직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일단 일을 열심히 하고 책을 열심히 읽다보면 내공이 쌓이고, 내공이 쌓이다보면 사람들이 인정해줄 날이 오겠지하며 무심하게 내버려 두고자 한다. 이미 표피만 핥는 관계들을 여러 번 맺어왔고 여러번 깨뜨려왔기에 굳이 애써서 새로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한다. 지겹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돌보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애써 밝은 척 하기도 벅찬 세상이다. 우울할 때 우울하다고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어야, 다른 이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내게 동료가 한 말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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