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이 가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들
낮과 밤의 시간이 같아지는 춘분(春分, Spring Equinox)이 되자 따뜻한 남쪽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아이들과 봄꽃 구경을 다녀왔다. 해가 뜨기 전에 꽃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았다. 이슬도 꽃도 찬란하게 빛나더라. 사라질 모든 것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듯.
봄이 다 가기 전에 '봄에 관한 질문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여는 질문 : 봄을 부르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함께 질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봄을 부르는 질문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질문들을 만들고 서로 공유하다보니, 봄이 한걸음 더 내 삶으로 들어온 듯 하다. 보내준 질문들을 모아 비슷한 질문끼리 엮어보았다. 이번 가족여행에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사진에 질문들을 덧 씌우니 그럴 듯해 보인다.
늘 그렇듯 모든 질문에 답하려 하지 말라.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질문 몇가지 골라, 함께 대화 나누며 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핀 것이다. 내 손으로 꽃을 피운 게 아니라 꽃은 자기 스스로 피어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한순간이나마 본질과 현상이 전도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_ 정호승
겨울과 봄 사이엔 경계가 모호하다. '2월 29일까지는 겨울이고, 3월 1일 부터는 봄이다.'는 것도 이상하고, 쌀쌀하기만 한 '입춘부터 봄이다'는 주장은 더 와닿지 않는다.
새로운 싹이 트고, 겨우내 입었던 두꺼운 옷들이 불편해 지면서 봄을 느낀다. 그리고 꽃이 피면 '정말 봄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에서도 봄을 느낀다. 봄은 온기를 품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이다보니, 나도 의미놀이를 해 본다. 내게 봄은 둘째가 태어난 계절이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계절이다. 시작은 창대하고 그 끝은 늘 미약했던 내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에 무엇인가 새롭게 도전하는 일들이 많아 좋다. 봄은 한마디로 '새로움'이다.
봄은 사람과 함께 온다. 겨우내 움츠려서 어디엔가 숨어있던 이들이 하나 둘 만나자고 연락을 한다. 그 만남을 통해 나는 비로서 봄을 선물로 받게 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언제'는 바로 '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봄이 지나도록 밥 한번 먹지 못한다면 겨울까지 밥 먹긴 글렀다.
어린 시절의 봄은 농사짓는 부모님을 피해 꾀 부리고 도망다니던 시절이었다.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에 갖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회사 다니는 시절은 봄이 왔는지, 갔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가장 봄 다웠던 때는 대학 신입생 때였다. 그렇게 추억하는 이유는 남쪽 해안가에서 자라왔기에 거의 보지 못했던 벗꽃이 휘날리는 모습 때문이였으리라. 그리고 큰 배움을 얻을 것이라는 설레이던 기대를 품게했던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은 '벗꽃'이 떨어지던 때에 맞춰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봄에 가장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꽃보다는 '나비'다. 위태롭게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나비는 언제나 눈을 때지 못하게 한다. 나비는 기어다니던 애벌레들에게 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처럼 쓰인다. 그런데 나비는 이슬과 꿀을 제외하고 이전처럼 아무 잎이나 먹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날 수 있음은 너무도 매력적이라, 잎따위는 기꺼이 던져버리고 싶게한다. 그런데 모든 나비들이 애벌레일 시절 충분히 잎을 먹고 뻔데기가 되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내겐 질문 하나 하나가 씨앗이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올바른 토양 위해 씨앗을 심지 않으면 싹이 트지 않는다. 올해엔 '책'이라는 결실을 맺어보려고, '다르게 질문하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정말로 누구에게나 꽃피는 장소가 따로 있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일만 남았다.
_ J. M. 에르
어디에서 피어날 것인가? 신이 인간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 '아이에카(ayyeka) :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했던가. 당신이 활짝 피어날 곳은 어디인가?
'지금여기'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지금 답은 '그렇다'이다.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록 더 건강한 싹이 튼다'는 속설이 사실일지 궁금하다. 난 지난 겨울 빈 항아리들을 준비했다. 항아리 안은 비어 있어서, 올 한해 그 항아리를 가득채워보려고 한다. 그 항아리의 이름은 '질문'이며, 항아리 속에 채워 넣을 것은 '만남'이다.
그러게. 그것이 무엇일지 나도 궁금하다. 아마도 '글쓰기'가 아닐까? 어설프더라도 글쓰기를 삶 속으로 품어내고 싶다. 잘 쓰려하기 보다는 자주 쓰려한다. 농작물들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듯, 자라는 새순에게 충분히 먹물을 머금을 수 있게 하고 싶다.
햇살? 바람? 봄비? 내 자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여전히 만남이다. 큰 어른들과 만나서 배우고 싶고, 리더들과 만나서 더 좋은 영향력을 기획하고 싶다. 젊은 친구들과 만나서 내 부족함을 비춰보고 싶다. 다만 우리 가족에게는 내가 햇살이고 바람이고 봄비라는 것을 종종 까먹는다는 것이 문제다. 봄가뭄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꽃이 어디 반짝하고 피던가
꽃이 어디 톡톡 튀며 피던가
꽃은 끙끙하며 피어나지
어둠 속 뿌리로 떨면서 피어나지'
_박노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만큼 사람들을 괴롭혀온 질문은 없으리라. 답하기 어렵다. 내가 어떤 꽃인지는, 꽃을 불러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다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불러주는 사람에 의해 규정된다. 단지 남이 붙인 이름에 따라 살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꽃인지 모르는 멍청이들과 너무 오래 함께 하지 말란 소리다.
우리 마느님(하늘같은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은 꽃을 좋아한다. 꽃 한 송이 제대로 선물하지 못한 남편만나 고생이 많다. 아내에게는 꽃 향기가 나서 꽃을 선물할 필요를 못느낀 것일테지. 다만 꽃피면 산에 들에 함께 더 자주 산책이라도 다녀야겠다.
그대가 아직 자신의 삶을 꽃 피우지 못했다면, 당신이 꽃 피우길 기다리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해서이다. 당신을 피어나게 하는 것은 당신의 노력이 아니라, 당신이 피어나길 바라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누구도 스스로 힘만으로 피어날 수 없다.
모두 저마다의 향기를 품게 된다. 내 삶엔 '지혜로움'과 '따뜻함' 그리고 '온전함'이라는 향기가 더 스며들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향기가 꽃과 벌을 이끌듯,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향기가 부족하다면, 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삶은 만남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게 된다. 질문 역시도 그렇고. 그래서 누군가 찾아왔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올 봄엔 누가 찾아올 것인지 궁금하다.
만약 이 봄이 다 가기전에 당신에게 하루가 주어진다면? 누구와 만나야 할까? 그와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
혼자서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함께 만나 이야기 나눠야겠다.
봄날을 간다. 꽃은 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사라진다면, 누가 우리를 그리워 할 것인가? 단 한 명이라도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는 삶이다.
2016. 3. 22. 질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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