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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봄 Nov 22. 2021

씨 뿌리는 계절, 저녁때

빅토르 마리 위고의 시 한 편 필사 및 낭송본을 올려둡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입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살얼음이 어는 시기라고 하는데, 아침과 저녁 찬바람을 맞으며 다가오는 겨울을 느끼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던 설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몸도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제 삶을 마주 바라보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계절, 저녁때> 필사 및 낭송 영상입니다. 


  『레미제라블』로 잘 알려진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시 한 편을 읽고 필사하다가 따스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황혼의 넓은 들판을 오가며 씨앗을 뿌리는 노인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그의 시에서 미리엔 신부님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인간의 정신도 밭이다"던 그의 말을 되새기다가, 저와 벗의 마음밭에 좋은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고 있는지 돌아보며 부끄러워집니다.


  시(詩)와 씨는 발음이 비슷하지요. 마흔 무렵 제 어둔 그림자를 마주하고 돌보는 여정 중에 「이것은 시가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담은 글을 끄적여둔 적이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인정받은 시를 써본 적 없는 아마추어 시인이지만,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싶진 않았나 봅니다.

저의 첫 시집 <다시, 묻다>에 질문과 함께 담아두었습니다. 



새로운 씨앗을 심기에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인간은 봄이 오기 전에 파종을 하지만 자연은 대게 가을날 결실을 떨구며 씨앗을 미리 심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얼어붙은 겨울 땅이 녹을 때까지 씨앗은 잠들어 있겠지만, 다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때 즈음 생명력 넘치는 싹을 틔우겠지요.


  인생의 황혼에도 다음 세대를 위해 씨앗을 뿌리고 있는 선배들의 멋진 뒷모습이 생각나 오늘도 씨앗 시 한 편을 벗 삼아 두서없는 글 한편 끄적여둡니다.



지금은 황혼
나는 황홀히 바라본다, 문턱에 앉아.  
노동의 마지막 시간이
비춰주는 하루의 나머지를.  

밤이 미역 감긴 대지에서
나는 감동해서 바라본다.  
미래의 수확을 밭고랑에
한 줌 가득 던지는 누더기 입은 한 노인을.  

그의 키 큰 검은 실루엣은
 어둠이 짙은 밭을 지배한다.  
어느 만큼 그는 유익한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감을 믿어도 좋으리.  

그는 넓은 들판을 걷는다.  
오가며 씨를 멀리 뿌린다.
 손을 다시 펴서는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눈에 띄지 않는 증인이 되어서.  

그러는 동안 막을 내리며
어둠은, 소란한 소리와 뒤섞여
씨 뿌리는 농부의 장엄한 모습을
하늘의 별까지 뻗치는 듯하다.  

_ 빅토르 위고 <씨 뿌리는 계절, 저녁때>  


> 삼봄詩정원에서 낭송본으로 듣기 : https://podbbang.page.link/s1vXtey4B6P5U3N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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