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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Feb 17. 2023

난 몰랐어, 수영복이 이리 다채로운지

수영복에 빠지면 가산탕진은 시간문제



 수영복이란 검은색 혹은 짙은 네이비색 바탕에 원색의 줄무늬 몇 개를 포인트로 허리 라인 정도를 살려주는 디자인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날씬해 보이니까. 20대에 남자친구와 실내수영장 데이트를 약속하고 사 입었던 원피스 수영복이 그러했다. 작년 가을, 수영 강습을 신청한 후 제일 먼저 수영복을 검색했다. 자고로 운동은 장비빨 아니던가.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래야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쉽게 그만두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



 독서의 계절 가을에 마음만 살찌웠어야 했는데 몸도 같이 찌워버린 나는 허벅지까지 탄탄하게 가려주고 잡아줄 '아레나 5부 전신 수영복'을 검색해 구입했다. 이전 글에도 밝혔듯, 동네 엄마들과 수영복을 입고 마주하는 상황이 상당히 껄끄러웠다. 최대한 몸을 가려주는 수영복이면 좀 괜찮으려나 싶었던 마음이었다.




 수영강습이 시작되고 한 주, 두 주가 지나가며 어느 정도 운동에 적응이 되자 다른 회원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몰랐다. 수영복이 이리 다채로운지. 세상의 모든 형형색색의 수영복들이 수영장의 파란 물속에서 어우러져 헤엄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유교걸 그 자체였다.


 동네 언니들이 내 생일을 앞두고 수영복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브랜드 '르망고'의 신상 수영복들이다. 언니들의 말로는 신상은 선빵이 중요하단다. 수많은 수영복 브랜드들이 시즌별로 신상을 출시하는데, 가장 빨리 사서 가장 빨리 입지 않으면 나중엔 누군가를 따라 입은 꼴이 되고야 만다나. 모델컷을 보니 난 도저히 못 입겠다 싶었지만 거절을 하지도 못하고 그중에서 무난해 보이는 색과 디자인으로 골랐다.



 그렇게 집으로 배송되어 온 수영복은 내가 요청한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 작은 제품이었다. 수영복은 입다 보면 늘어나기 마련이고, 일단 몸에 어떻게든 구겨 넣어 수영복을 입고서 몸을 펼 수만 있으면 맞는 사이즈란다. 정말 다 처음 들어보는 수영복 이론이다. 분명 수영을 몇 개월 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언니들이었는데. 수영복의 세계에서 나는 완전 초짜다.


 언니들이 알려준 '수영복 코디카페(S.H.C)'에 가입하고 밤을 새워 수영복 세계에 대해 공부했다. 수영복을 코디한다니, 그냥 입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수영복, 수모, 수경을 그날의 기분에 따라, 혹은 수업 내용에 따라 달리 코디하여 입는 수영인들이 그 카페에 모두 모여 있었다. 수경 줄을 직접 꼬아 만들기도 한다. 수영복을 판매하는 국산 브랜드로는 르망고 센티 후그 움파 등의  브랜드들이 인기 있었고, 해외브랜드에서는 '졸린'과 '펑키타'라는 호주 브랜드가 대세였다. 특히 '졸린'이 단연 탑이었는데 유교걸로서 절대 입을 수 없는 크기의 엉덩이천이 특징이었다.(스포츠 브랜드인 아레나, 나이키, 배럴도 있다) 수모는 브랜드 수모도 있지만 제작해서 판매하는 수모를 선호하는 듯했다. 물론 수모도 '졸린'이 탑이다.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수영복코디카페에서는 매달 장터가 열리며, 중고품부터 새 제품까지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신세계였다.




 수영복을 몇 날 며칠 구경하다 보니 용기가 생겼나 보다. 선물 받은 르망고 신상 수영복을 입고 강습에 갔다. 언니들의 환호를 받았고, 강사님에게도 같은 반 회원님들에게도 수영복 예쁘다는 인사를 받았다. 이 맛에 예쁜 수영복 입는 거구나. 한 번이 어렵지, 예쁜 신상 수영복을 입고 나니 유교걸 수영복(5부 수영복)은 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못 입겠더라. 고이 접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매일매일 수영복을 구경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네이버카페를 들락날락, 수영복 브랜드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식욕을 제치고 물욕이 올라온다. 제어하지 않으면 가산탕진은 시간문제일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날 수영복의 신세계로 인도해 준 동네언니는 수영시작 6개월 만에 수영복이 10개가 넘는다고 다. 수영이 어렵고 영법이 몸에 익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극복하기 위해 하나씩 사들였단다. 그런데 수영복만 10개이고, 수모도 그 정도, 수경도. '수영복 코디카페'에는 수영복 100벌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


 장비빨이 필요 없고(없는 줄 알았다) 적은 강습비용이기에 시작한 운동인데 가정의 경제상황을 구렁텅이로 몰 수는 없다. 나는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수영복을 사고는 싶고, 사면 생활비 마이너스인데 어떡하나 싶고, 그런데 원래 매달 마이너스였고. 돌고 도는 생각들. 대책이 필요하다. 이왕 어렵게 시작한 운동인데 당근도 적절히 주어야 지속하는데 힘을 받을 터, 나 자신과 타협했다.



 한 달에 한 번, 한 품목만 구입하기.
그렇게 수영복을 한 벌 더 사고, 수모를 사고, 수경을 사고, 다시 이번 달 수영복을 샀다. 절제한 나 자신에게 셀프 칭찬을 해주고 싶다.(사실 수모는 저렴한 가격이라 두 개쯤 더 샀다) 수영복을 한 개만 가지고 주야장천 입는 것보다 돌려가며 입는 것이 더 오래 입을 수 있는 팁이라고 들었다. 나는 자기 합리화 천재다.



 불과 몇 개월 전영원히 입지 못할 것 같았던 원피스 수영복은  입장과 퇴장 시에만 살짝 민망할 뿐, 물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어느 정도 벗고 있으니 괜찮다. 예쁜 옷을 입은 날에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겨 누굴 만나도 당당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예쁜 수영복을 입을 생각이 더해지니 수영장 가는 발걸음이 더 가볍다. 수영도 더 잘하게 되는 것 같고, 수영복 입고 싶어서 자유수영이라도 한 번 더 가게 된다. 순환이다.





수영하는 일상이 즐겁다. 수영하는 내가 좋다.

그리고 기억하자. 수태기엔 수영복 쇼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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