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것 좀 봐! 장미허브를 핫도그 모양으로 키울 수 있데!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근데 순 따기는 어떻게 하는 거지? 저기..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남편을 만난 지 12년이 넘었는데도 서로의 취향이 참 다르다는 걸 실감한다. 남편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지만, 유독 식물에 관한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돌아오는 형식적인 대답은 변함없이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식물에 푹 빠져버린 나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마음껏 나눌 상대가 없어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내게 인터넷 식물카페는 그야말로 대나무 숲 같았다. 그곳에서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임을 털어놓는 궁전 이발사의 심정이 되어 온종일 식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새롭게 들인 식물의 사진을 찍어 올리면 모두가 환영하는 댓글을 달아주었고, 반대로 다른 회원들이 키우는 반려식물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식물카페를 통해 화원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실내 식물을 알게 되었고, 실내 가드닝이 인간의 일상을 얼마만큼 풍요롭게 가꿔주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식물카페의 또 다른 장점은 식물을 잘 키울 수 있는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키우던 식물이 시들거나 병충해를 입어 고민이 될 때면 가장 먼저 식물카페를 찾는다. 식물의 현재 상태를 상세히 기입해 도움을 청하면, 너도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식물을 되살렸던 경험과 팁들을 공유해주었다. 경험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귀중한 암묵적인 지식들은 실제로 병든 식물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회원님들의 다정한 조언에 힘 입어 우리 집 식물들은 전보다 건강해졌다.
식물카페는 특이한 가입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가입할 당시 복잡한 가입절차가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앞으로 활동할 닉네임이 무엇인지, 카페의 규칙을 준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간단한 질문 몇 가지가 전부여서 놀랬다. 그저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식물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면 충분한 가입 조건이라니.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얼만큼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사회에서의 모임과 명확히 차별된다.
어딘가 소속되는 것에 피로도를 많이 느끼는 탓에 흔한 동아리 한번 가입해본 적 없는 나는, 신기하게도 이 식물카페 만큼은 꽤 오랜 기간 유지 중이다. 식물이라는 취향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그곳에서는 누구나 즐겁게 자신의 식물 생활을 공유할 수 있지만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쉴 수 있었다. 철저히 익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상호 간 '닉네임+님'으로 호칭하며 서로를 예의 있게 대했고, 상호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 부담도 없었다. 식물카페야말로 살면서 경험해온 가장 수평적이며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남편은 카페 활동에 푹 빠진 나를 보며 '참 가지가지한다'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내심 속마음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더는 관심도 없는 식물 사진을 보며 맞장구를 치지 않아도 되고, 키우는 식물이 어쩌고 하는 식물 수다를 애써 경청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나 또한 그의 형식적인 추임새에 실망할 일이 없어 좋았다. 이미 전국에 있는 나의 취향 공동체 덕분에 나는 남편에게 취향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연스레 부부간 취향을 존중하는 우아한 아내 코스프레가 가능해 진 것이다.
구구절절 자랑을 늘어놓다 보니 꽤 오랫동안 자발적 휴먼 상태였던 식물카페가 궁금해졌다. 이런.. 오랜만에 접속해 보니 회원 등급이 하향 조정된 것 같다. 열심히 식물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서 쌓아 올린, 학교로 치면 반장은 아니지만 부반장 레벨쯤 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쉽지만 괜찮다. 언제라도 여유가 생길 때 또다시 차곡차곡 나만의 식물 마일리지를 쌓으면 되니까. 그리고 이토록 철저한 운영방식 또한 내가 이 온 동네 식물 집사들의 모임을 사랑하는 이유다.
글.그림: 김세경(꽃개미)
회사원이며 작가.
HR부서의 교육담당자(HRD)로 일하며, 퇴근 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식물을 키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 8년째 식물을 키웁니다. 잘 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