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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개미 Jun 21. 2022

작고 연약한 것들을 대하는 마음

꽃을 밟지 마시오 


비밀 정원 

아무도 모르는 만의 비밀 정원이 있다. 바로 회사  국세청 건물 1층에 있는 작은 화단이다. 빌딩 숲으로 뒤덮인 서울 광화문 한복판, 하루에도 수많은 직장인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위치한 화단에는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 사시사철 예쁜 꽃들이 심겨 있다. 나는 그 화단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른이 된 후 꽃은 기념일이나 공식적인 축하 자리에서나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인데, 아침저녁 싱그러운 꽃을 마주하다 보면 매일 축하받는 기분이 다.


올봄엔 화단에 튤립 구근이 심겼다. 하루는 겨우 내 꽁꽁 얼어붙어 있던 흙 위로 “이곳에 꽃이 심겨 있어요”라는 팻말이 세워지더니, 귀여운 새싹들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고개를 들었다. 새싹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고, 곧 쏟아진 봄비를 흠뻑 맞고는 동글동글 귀여운 꽃 몽우리로 변해 있었다. 집에서 주로 성장이 더딘 실내 식물들을 키우다 보니 빠르게 변하는 튤립의 성장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도심에서 나고 자란 튤립들을 지켜보며 자주 감탄했고, 감사했다.


그 무렵 나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회사 생활의 방황기를 겪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 백번씩 퇴사를 고민하던 내게 화단은 유일하게 기쁨을 주는 장소였다. 광화문은 이제 신물이 난다면서 두 번 다시 이곳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씩씩 대다가도, 싱그러운 튤립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꽃들은 삭막한 도심의 직장인을 남몰래 위로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그곳을 지나던 중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튤립들이 누군가에게 무참히 밟혀 죄다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일부는 마구 헤집어져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어제까지도 매일 싱그러움을 선물하던 나만의 비밀정원이 몹시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화단에는 (아마도 관리인이 급하게 마련했을) 팻말에 "꽃을 밟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팻말을 세운 사람도 나처럼 당황했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날 속상한 마음에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비밀 정원은 그 후로도 여러 번 갑작스레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가, 또다시 새로운 꽃들로 채워 지기를 반복했다.



작고 연약한 것들을 대하는 마음 

나는 누군가 고의적으로 화단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빼앗길 만큼의 미움을 사기에 화단의 튤립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저 이곳을 지나는 부주의한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밟고 지나갔을 것이라고. 그게 아니면 화단에 떨어진 소지품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었다. 작고 연약한 튤립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갔을 것을 상상하면 내 마음도 어둡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곤 팻말에 쓰인 대로 사람들이 꽃을 밟지 않기를, 아니, 꽃들이 제발 밟히지 말고 무사하기를 날마다 바라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대체 남의 화단에 왜 이리도 집착을 하느냐고. 그깟 꽃 몇 송이가 뭐 그리도 대단한 의미냐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작은 씨앗이 힘겹게 싹을 틔우는 모습을 마주하고, 대낮의 햇살 아래 줄기와 잎을 키우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꽃들은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직접 물을 주거나 돌봄의 손길을 내어 준 적 없지만 꽃들을 향한 알 수 없는 애정이 생긴다. 그렇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진짜 화단 관리인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키워온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내가 식물 집사이기에 가능한 것 인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도 아스팔트 사이에서 힘겹게 고개를 내민 들풀에 시선이 가고, 동료들과 식당에 들어서면 창가에 쪼르륵 늘어선 다육이들이 먼저 보인다. 재미없는 회색빛 건물 사이를 꼬박꼬박 메꿔주는 나무들 덕분에 도심에서의 삶도 나름의 그리너리 라이프(greenery life)라 믿게 되었다. 내게 더 이상 식물은 누구의 소유나 관상이 아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이다. 이런 마음이야 말로 식물 집사로 살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생태적 소양인 셈이다.


나는 도심의 어른들이 주변의 작고 연약한 것을 대할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좋겠다. 휴식이 필요할 때 도심의 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에 앉아 쉬면서, 담배꽁초를 화단에 던지고 침을 뱉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그곳에 들이 자리한 것을 알면서 무심한 척 밟고 지나가는 행위는 이기적인 태도다.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모인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에 의해 자리 잡은 도심의 화초들. 그런 그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하기 어렵다면, 비슷한 처지인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며 상생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로 바라는 건 단 하나다. 내 비밀 정원의 꽃들이 밟히지 않고 오래오래 싱그러움을 유지하기를. 그렇게 이곳 광화문에서의 한해를 건강히 살면서, 그곳을 지나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길 바란다.


그러니 제발, 꽃을 밟지 마시오.




글.그림: 김세경(꽃개미)

회사원이며 작가.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 <엄마가 되었지만, 저도 소중합니다>의 저자.

낮에는 HR 부서의 담당자 일하며 퇴근 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식물을 돌보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 8년째 키우고 있습니다. 잘 죽입니다.

/인스타: @sammyk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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