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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개미 Aug 15. 2022

무기력한 나에게 흑법사가 말했다

모든 걸 멈추어도 괜찮아


무기력이 찾아왔다


심각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몇 차례 크고 작은 상실감을 겪고, 그 과정에서 친한 동료들이 너도나도 지상낙원을 찾아 떠난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의지했던 사람들을 잃고 나니 왠지 나 또한 그 여정에 동참해야 할 것 같았다. 때마침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현재의 회사보다 큰 규모,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좋은 기회 같아 욕심이 났다.


경력사원의 이직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었다. 인적성검사에서는 내가 이곳의 문화에 잘 녹아드는 인재라는 것을 어필해야 했고, 실무면접에서는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이 모든 관문을 뚫고 임원면접을 보게 되자 내심 기대가 되었다.


며칠 후 결과는 보기 좋게 탈락이었다. 실패에 대한 충격도 컸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현재로 돌아올 수 없는 마음 상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심정이 되어 자주 나의 처지를 비관했고, 어느 순간 무기력은 이미 찾아와 내 곁에 있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일들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더는 이직 준비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회사에 열정을 보태려 하지도 않았다. 항상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제안하고 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을 즐던 나였는데, 주어진 일들만 꾸역꾸역 하며 지내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회사 밖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원이면서 작가도 활동하는 나는, 두 번째 책을 출간하고 관련된 활동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회들을 제안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말았다. 회사의 친한 선배는 이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다들 제 몫을 다 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싱그럽고 울창한 계절을 보내는 가운데 나만 아무런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초조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쩌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하면서.



흑법사처럼 쉬어 보자  


그렇게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숨만 쉬고 있는 내 눈에 식물이 보였다. 베란다 한편에서 한 여름 휴면기를 보내고 있는 다육식물 '흑법사'였다. 다육식물은 대부분 봄과 가을에 성장을 하는데, 독특하게도 특정 계절에만 성장하는 종류가 있다. 시원한 온도를 좋아해서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성장을 하고 여름이 되면 휴면하는 '동형 다육', 반대로 여름에 성장을 하고 겨울에 휴면하는 '하형다육'이다. 흑법사는 여름엔 잠을 자고 추운 겨울에 성장을 하는 전형적인 동형 다육이다.  


봄이 되면 새순을 틔우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흑법사는 깊은 잠에 빠질 준비를 한다. 먼저 검붉은 장미를 닮은 얼굴을 서서히 오므리고, 그런 다음 아주 작고 단단한 크기로 줄어든 상태로, 얼음! 아무리 물을 주어도 줄기와 잎장에 변화가 없다는 건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는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일부러 물을 말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푹 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멈춘 채 죽은 듯 여름을 보내는 흑법사. 나는 그런 흑법사가 새삼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내게 찾아온 이 무기력은 일종의 휴면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건 지금은 어떤 일에도 열정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지쳤다는 것이고, 그러니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가 아닐까?

휴면기를 무사히 보내야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것이라면, 괜히 어설프게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짐했다. 지금부턴 흑법사처럼 쉬어보자고.


식물이 휴면기를 무사히 보내고 깨어나는 모습은 경이롭다. 휴면을 마친 흑법사는 시들거나 초라해지기는커녕, 전보다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곤 했다. 어떨 땐 1개뿐이었던 얼굴이 3개로 늘어난 적도 있다. 푹 쉬었기 때문에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기력한 이들에게 흑법사처럼 쉬어볼 것을 권한다. 내게 적정한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휴식이라 생각하면 무기력도 필요한 것이 된다. 분명 다시 피어날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영영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야 만다. 개화의 시기가 조금 늦게 오더라도, 지금 당장 다른 이들이 내 아름다움을 몰라주더라도 괜찮다. 모두가 저문 가운데 홀로 빛나고 있을 존재는 바로 내가 될 테니까.

매년 겨울이 되면 모든 식물이 웅크리고 있는 생기 잃은 베란다에서, 홀로 아름답게 만개하는 저기 저 흑법사처럼!



글.그림: 김세경(꽃개미)

낮에는 HR 부서의 담당자 일하고 퇴근 후 그림일기로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 낮에 창가의 식물이 주는 평온을 사랑합니다.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 <엄마가 되었지만, 저도 소중합니다>의 저자

인스타: @sammyk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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