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손이 덜 가는 방향으로
아... 저질러 버렸다.
"Sam, 이따 저녁에 갈게. 오늘 한국 음식 파티 완전 기대하고 있어!"
MBA 클래스 메이트들을 집으로 초대하면서, 한국음식을 풀코스로 내주겠다는 허언을 던지고는 눈앞에 닥쳐온 현실에 막막해졌다. 고작 30km 떨어진 서울에서 수원으로 출퇴근할 때도 멀다고 힘들어했는데, 이 곳은 서울에서 9,000km 떨어진 프랑스가 아닌가. 비빔밥, 불고기, 파전, 만두 정도로 메뉴를 정리하고, 만두피부터 만두소를 만들고 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내가 있는 곳에서 왕복 2시간이 걸리는 파리의 아시안 마트를 가기 위해 탄 기차 안에서, 나는 어제의 나를 원망하면서 준비 시간을 단축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도착한 아시안 마트에서 나는 한줄기 빛을 발견했다. 내가 애정하는 C사의 냉동 왕교자가 날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아, 네가 이역만리 이 곳까지 와 있었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치트키 덕분에 난 어림잡아 2, 3시간은 세이브할 수 있었고, 그날의 친구들은 지금도 가끔 그날 먹은 음식 이야기를 하곤 한다.(결코 맛이 없어서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아니리라 믿어본다.) 냉동 만두를 발견 못하고 몇 시간 동안 우직하게 만두를 하나하나 빚고 있었으면, 친구들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할지 아찔하다.
'아악, 큰일 났다! 생각이 안 난다.'
불과 얼마 전에도 물어봤던 업무 프로세스를 돌아서면 까먹고, 또 돌아서면 또 까먹고. 부끄럽게도 내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범중 하나가, 업무 프로세스가 기억이 안 나서 다시 주변에 묻거나 검색하느라 소모하는 시간이다. 희한하게 얼마 전에 진행했던 일도 다시 하려면 기억이 새까맣게 지워져 있는 일이 많았다. 이게 혹시 알콜성 치매가 아닐까 진지하게 두려움에 떨었지만, 의외로 주위의 많은 동료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노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받곤 했다. 사실 그 반복적인 시간 소모의 해결방법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처음에 조금 귀찮을 뿐. 나는 매번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를 진행하거나 새로운 툴을 사용하게 될 때마다, 디테일하게 단계별로 하나하나 정리해두었다. 삼성 시절에는 훈민정음이나 워드에 기록했고, 구글에서는 구글 문서(Google Docs)를 사용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내 정리 도구도 바뀐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내가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작성, 수정이 자유롭게 가능해서,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를 위한 업무 매뉴얼이 풍부해질수록,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혹은 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발만 동동거리며 허송세월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도 여쭈었는데 또 똑같은걸 문의드려 죄송한데요, 저희 신제품을 구글 제품과 연동하고 싶은데 그 프로세스 다시 좀 안내받을 수 있을까요?"
파트너사의 담당자가 겸연쩍어하며 내게 묻는다. 매뉴얼은 나를 위한 매뉴얼도 있지만, 남을 위한 매뉴얼도 필요했다. 업무를 하다 보면 나의 경우는 외부 파트너, 클라이언트, 또는 유관부서의 문의나 요청에 대응해야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도 역시 나랑 비슷해서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다시 문의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건망증 꿈나무로서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에, 서로 민망한 반복 문의와 반복 안내를 피하기 위한 FAQ의 매뉴얼도 틈틈이 정리를 해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매뉴얼을 한번 공유해두면 서로 마음도 편하고 시간을 아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자료 만들다가 하루가 다 가는구나..."
내게 있어 일의 공수를 줄이는 또 하나의 요령은 자료의 플랫폼화이다. 클라이언트나 파트너를 만나 신규 사업 제안을 많이 하는 업무 특성상, 제안 자료나 발표 자료를 만들 일이 많은 내게 자료 작성은 업무 시간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나야 하는 외부업체가 다양하다 보니, 하나하나 자료를 따로 만들어 구성을 했고, 발표의 주제도 미묘하게 다 달라서 각각 구상을 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핵심 업무인 신규 사업 파트너 발굴을 위한 업무 시간까지 줄어드는 문제가 드러났고, 나는 해결책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내가 만든 제안 자료와 발표 자료들을 주욱 훑어보니, 표현만 조금씩 다른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미묘하게 다 달랐던 발표의 주제도 파트너사와 구글의 협업 수준에 따라 카테고리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자료들을 구조화한 것을 기반으로,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 이후의 모든 자료를 플랫폼화하기로 했다. 하나의 완성도 높은 범용 자료를 만든 뒤, 각 업체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을 해서 활용하는 방식. 그래서 매 시즌마다 기술 트렌드와 내가 진행하고자 하는 사업 아이템을 기준으로 하나의 큰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범용 자료를 협업 단계별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각 업체에 맞춰 제안을 하는 방식으로 준비를 하자 제안의 완성도가 올라갔고, 만날 수 있는 업체는 늘어났으며, 자료 준비시간은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일은 덜하면서, 일을 더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XX님, 혹시 OO기술을 활용한 솔루션으로 피치*한 적 있어요?"
"네, 저번에 제 클라이언트에게 발표한 자료 있어요. 보내드릴게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노동을 공유하는 '두레'와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이 정신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혼자 끙끙대지 않고 동료들과 자료를 공유하면서, 나의 일은 훨씬 줄어들 수 있었다. 앞서 내 자료를 플랫폼화 하면서 자료의 퀄리티가 올라간 만큼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나도 그들로부터 그런 양질의 자료를 공유받아 활용함으로써 파트너사들에게도 더 좋은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자료 공유의 또 하나의 장점은 혼자 만든 자료만을 쓰는 것보다 더 최신의 자료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의 기술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새로 쏟아져 나오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계속 공부를 하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협업이 중요하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시험공부를 같이 하다 보면 농담 따먹기 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아 그냥 혼자 할 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문제가 안 풀릴 때는 누군가 한 명씩은 돌아가면서 답을 아는 친구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된 적이 종종 있었다. 바로 그 '집단 지성의 힘'이 회사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마워요, 냉동 만두!
냉동 만두 덕분에 그날의 파티를 무사히 잘 치른 것처럼, 결과물이 같다면 일에 들이는 공수는 최소화하는 게 소중한 나의 개인 시간을 위해서도, 중요한 업무에 시간을 더 투자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걸 절감해왔다. 일하다 보면, '이런 건 반복되는데', '이런 건 겹치는데', '이런 건 공유가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일이 참 많다. 그럴 때 단지 생각에 머물고 넘어가면, 또다시 그다음에 똑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당장 너무 귀찮다는 생각에 '에라 모르겠다.' 넘어가곤 하다가 어제의 나를 꾸짖는 오늘의 나를 보면서, 하나씩 일에 들어가는 품을 줄이는 노력을 했더니 조금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여유 있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우리의 인생은 천년만년이 아니고,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왕이면 일에 들어가는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계속해서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표제 사진 출처 : pixabay.com/en/bulletin-board-laptop-computer-3233653/
*피치: Sales Pitch의 준말. 고객을 설득하기 위한 제품 소개 등의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