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할 때, 들려오는 언어에 귀 기울여본 적 있는가. 출발지에서는 그곳 언어만 들리는 듯하다가, 도착지에 다가갈 때 즈음이면 도착지의 언어가 크게 들린다. 처음에는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도착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집에 다 왔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도 있을 테고, 어쩌면 여행지에 도착하는 내 마음이 더 부각되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닌 건가 짐작해본다. 어느새 출발지는 잊고 도착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 것일 테다.
나도 한때는 머나먼 길, 기차를 타고 세월을 길에 뿌려가며 다녀본 적이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정도는 타 줘야 장거리 기차 좀 탔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겨우 2박 3일 기차를 탄 것은 장거리 기차 탔다는 축에도 못 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참 길다. 다시 타라고 하면 2박 3일은커녕, 몇 시간도 타기 싫다.
기차 여행에서 시간은 정말 안 간다. 도착지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며, 때로는 기억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고, 때로는 일부러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더 이상 시간은 금이 아니다. 버텨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현재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여행을 하는 것이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기차와 함께 끊임없이 달린다.
기차라는 공간 안에서 버티고 또 버티며 견뎌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려면 견뎌야 하는 과정인데 그 시간 덕에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와 가족과 그 모든 시간을 찬찬히 들춰보며 사색에 잠기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처음 보는 생소한 역에 내려 동네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작은 마을이어서 볼 것이 없다고 해도 어쩌면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훅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일부러 그런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딱 한 번. 인도 여행을 하다가 실수로 작은 마을에서 내린 적이 있다. 인도의 아그라에서 수도인 델리로 가는 길이었다. 새벽 기차를 탔다. 그 구간은 원래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데, 기차를 잘못 선택했는지 너무 느리게 가는 것이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서 더 빠른 기차로 타고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그 역에 무작정 내려서 다음 열차가 언제 오냐고 물어보았는데, 아뿔싸, 오후에나 온다는 것이다.
그래, 뭐,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동네 한 바퀴 돌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러다 보면 시간 금방 가겠지, 그냥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가 그 역에 갔을 때 내리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동네는 작고 적막했다. 한 바퀴 휙 돌고 왔는데 그냥 무료하기만 했다. 동네 문방구에서 수첩 하나 구입하고, 간단하게 무언가 사 먹고 보니, 할 일도 없다. 째깍째깍, 멍, 째깍째깍, 시간이 안 간다.
그날 결국 델리에는 밤늦게 도착했다. 도착했으니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흘러갔다. 어느 책 제목엔가 이런 말이 있다. '기차를 놓치고 천사를 만났다'라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선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사도 사람도 안 보이는 적막한 곳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서 기차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온다고 했으니 오긴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멍 때리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P.S: 아참, 그때 산 수첩은 몇 장 쓰지도 않고 그다음에는 버리지도 못하며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