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는 첫 번째 만들어진 예술영화 <내 고향>이다. 이 영화 역시 월북작가, 예술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이중 시나리오는 김승구(1914-1994)가 맡았다.
김승구와 내고향
김승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유학 후 조선에 건너와 극작가로 활동했다. 「유민」이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극작을 시작했고, <산하유정>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후원하는 연극경연대회에서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시나리오도 쓰긴 했는데,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은 없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한편도 써보지 않았던 사람이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의 시나리오를 맡게 된 이유가 있었다. 광복 당시에 북한에는 영화와 관련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화인들은 영화회사가 있는 서울에 살고 있었기에 북한에는 은퇴한 영화인이나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온 사람들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 활동하던 시나리오 작가로 오영진이 있었지만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평양을 떠나 서울로 왔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인력부족이 심했는데 특히 영화관련 토대가 전무했던 상황이라 영화인들은 한명, 한명 다 귀했다. 김승구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인물 중에 가장 먼저 북한으로 올라간 인물이었다. 1946년 봄에 월북한 그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예술과장으로 일했다. 다시 말해 북한의 예술부문을 책임지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누구보다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최초의 영화를 만드는데 그 시나리오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예술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북한당국은 물론 북한 사람들의 기대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최초의 작품으로 제작할지를 두고 논의가 많았다. 이때 강력하게 대두했던 주장이 우리의 대표적 민족 고전 <춘향전>을 영화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김승구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춘향전>을 여러 번 무대에 올려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춘향전>을 각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북한정권 수립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지는 영화라는 의미가 있었기에 북한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영화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계획된 작품은 바로 지주의 탄압으로 고향을 떠난 청년이 항일빨치산이 되어 활동하다가 광복된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정부수립에 공헌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는데 김일성을 비롯해 항일유격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참고했다고 한다. 영화가 완성되고 김일성이 제목을 <고향>이라고 하지 말고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제목이 <내 고향>으로 정해졌다.
최초의 예술영화로 거론되었던 <춘향전>은 북한에서 세 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9년 윤룡규 감독이 만든 <춘향전>이 첫 번째 만든 영화였고, 1980년 윤룡규 감독과 <내 고향>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유원준이 변학도 역으로까지 출연하면서 함께 연출을 맡았던 <춘향전>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이 만든 <사랑 사랑 내 사랑>이 세 번째인데, 첫 번째, 두 번째 <춘향전>은 김승구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김승구는 여러 편의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6.25전쟁이 끝나고 처음 만들어진 예술영화 <빨치산 처녀>는 황해도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던 여성 빨치산 조옥희를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김승구가 시나리오를 썼다.그리고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소재로 한 <돈화의 수림속에서>를 비롯해 <뜨거운 심정>이나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 <달매와 범달이> 등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는 1950년대에는 국립예술극장 총장으로도 있으면서 다수의 희곡도 창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