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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은 Jul 24. 2020

천시(天時)를 기다리며

의미 없는 취미는 없다

 대학 시절 내 일과는 이랬다.


 등교-수업-하교-야구


 고맙게도 이런 생활을 같이 해 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A라 칭하겠다.)와 나는 학교가 끝나면 야구장을 가거나 집에서 야구를 보거나 둘 중 하나로 저녁시간을 보냈다. 집도 가는 길이 비슷해서 집에 가는 내내 잘 터지지도 않는 DMB로 같이 경기를 보곤 했다.


 “오늘은 축제날이니까 수업 일찍 마칠게요.”라는 교수님의 말에도 야구장으로 달려갔고 “오늘 놀러 가자!”라는 동기들의 말에도 우리는 야구장을 향했다. 한 일주일에 서너 번쯤은 간 것 같다.


 집에서도 티브이 앞에서 네 개의 채널을 번갈아가며 보고 하이라이트까지 시청했는데, 그러다 보면 밤 11시였다. 티브이 앞에서 채널만 돌리고 있는 내게 별 말하지 않는 엄마였으나 취업시즌이 다가오면서 당신의 속도 타들어갔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난 아나운서가 될 거라며 동네방네 말하고 다녔고 간혹 다른 직업들에 매력을 느꼈으나 졸업 때까지 내 장래희망은 변치 않았다. 그러다가 야구에 빠질 무렵, 아나운서가 되긴 할 건데 스포츠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도 9시 뉴스를 하고 싶다는 지망생들이 다수였는데 그 와중에도 난 꿋꿋이 “전 스포츠 아나운서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꿈을 꾸었나 보다.


그 시절의 나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A와 같이 야구장에서 직관을 했다. 그 날 따라 쫄깃쫄깃한 경기였는데 그 승리의 기쁨에 취해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야구장을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신난 상태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분이 승리 팀 선수를 인터뷰하러 나오셨다. 그걸 보고 있는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바라던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A에게 “나 저 아나운서처럼 되고 싶어. 몇 년 후엔 내가 저기 있을게.”라고 말했다.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야구를 봐온 것이 엄청난 자산이라는 것을 느꼈다. 가장 가고 싶던 회사의 필기시험날, 긴장은 됐지만 여기서 내가 야구를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 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시험지를 받아보니 객관식이었는데 시험지 자체를 내는 방식이었다. 속으로 ‘시험지를 내면 이걸 다 보실 테니까 내가 아는 것을 다 쓰도록 하자.’라는 생각을 했다. 옳은 답을 고르라는 문제에는 오답노트처럼 다 맞는 말로 바꿔놨고 틀린 답을 고르라는 것에는 부연 설명까지 써놨었다. 당연히 좋은 성적으로 면접을 보게 되고 면접에서 “필기 1등 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결국 낙방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좌절하고 절망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학원 다닌지도 몇 개월 안됐으며 내 생각에도 한참 부족했던 것 같다.


 난 천시(天時)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늘과 내가 뜻이 맞는 그 시기가 분명히 있다. 막상 바라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바라던 방송국은 나와 천시가 맞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그 후 선배들 사이에서 “정말 야구에 미친 특이한 여자애가 있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그 소문 덕분인지 몰라도 좋은 채널에 합격했다. 첫 인터뷰가 있던 날, A가 우리 가족만큼이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A도 방송작가가 꿈이었는데 꼭 작가와 아나운서로 만나자며 눈물의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2018년 우리는 공중파에서 작가-아나운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친구와 나의 이름이 나란히


 그리고 의미 없는 취미는 없다. 그 취미는 한 사람을 살게도 만들며 에너지를 주기도 하고 나처럼 직업을 찾아주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행복이다. 그게 직업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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