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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은 Jul 30. 2020

문장 하나하나가 합쳐져 내가 만들어졌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책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가 생각을 해보면 또렷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엄마의 장바구니에 담긴 ‘퀴리부인’.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 책을 자주 선물해주셨는데 그게 하루의 행복이 되곤 했다. 마트와 서점이 같은 건물에 있었는데 엄마는 종종 나와 동생을 위한 책을 한 권씩 골라오셨다. ‘퀴리부인’ 이후 엄마의 귀갓길을 목 빠지게 기다렸었다.

 그때부터도 인상적인 일화나 문구들을 기억하고 되뇌길 좋아했다. 커가면서 책 취향이 생기고 본격적으로  내 문장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로 문학 작품만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적어 노트를 채워갔다. 편지를 쓸 때, 자기소개서를 쓸 때, 마음이 힘들 때.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이 노트를 뒤적이며 영감을 얻는다. 어느 때는 쓰는 것이 귀찮아 사진으로 대신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부스럭부스럭 노트에 적는 것이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문장들을 다 소개하고 싶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 몇 개를 소개하려 한다.


소중한 노트들. 왼쪽은 오래돼서 많이 낡았다.


-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 봐 안달이 난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온 문장인데, 이 책을 내 삶에 품고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이별은 늘 존재한다. 사랑이 우연으로 시작된다고 하지만 이별은 필연이다.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그렇게 상실을 겪고 나야만 깨닫는 것이 있다. 곁에 있을 때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자주 그 소중함을 잊는다. 애석하게도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몇 잃고 이 문장을 읽게 되었으나 조금 일찍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청춘의 문장들>은 내게 보석 같은 책이어서 친구들이 책을 추천해달라 할 때 제일 먼저 꺼내는 책이다. 내 공책에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몇 문장을 더 쓰고 싶다.

-우리가 잊고자 애쓰는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도 아직 잊지 못하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 속에 쌓아두면서.
-잊혀진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청춘은 멀이 가버렸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뜻 남아있는 듯.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어떤 일에도 담담하게 말하는 김연수 작가의 문체가 좋다. 읽으면서도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책은 지금의 청춘, 지금의 시간, 지금의 사람들을 더 돌아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당연하게 우리의 곁에 있지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주고 있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쓰라릴 테니까...


글씨는 원래 훨씬 더 잘쓴다..


 올해 들어 진행하던 프로그램 다섯 개가 없어졌다. 그 말인즉슨 직장 다섯 곳을 잃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금방 지나가겠지,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이 생활이 벌써 다섯 달이 다 되어간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그것도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내 평생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고 싶었다. 내 오랜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가 올 때마다 후회하게 되고 아파하고 매 번 그러고 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나약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하루하루 잘 참아내고 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꺼내보는 책이 있다. 바로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이다. 제목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데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마음을 콕콕 찌르는 동시에 치유해주는 그런 작품이다.


우리의 동경이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를 배반하고 신의 없게 굴어도 삶은 어느 날 그것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가만히 들려주게 될 거야. 그 날 너는 길을 걷다가 문득 가벼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하, 하고 작은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 두려워말고 새로이 맑은 오늘을 시작하는 것.

 

 몇 년 전에도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방송사와 계약이 끝나고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기가 올 때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는데 오늘은 뭘 하며 하루를 보내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상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하다. 사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데 연륜 때문인지, 새로운 가족이 생겨서인지 조금 강해진 것 같다. 동경이 현실처럼 되지 않을 때, 이 문장을 곱씹는다. 그래 무슨 이유가 있겠지. 더 좋은 일이 찾아오려고 이러는 거겠지. 스스로 위로해본다.  


 원래의 '나'의 모습에 이런 문장들이 더해져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소중히 간직한 문장 하나하나가 나를 이루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책을 읽고 필사하는 것이 취미기도 하지만 온전한 나를 만들어주는 행위기도 하다. 이 취미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문장들이 나를 감쌀 것이다. 그 문장들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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