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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은 Aug 30. 2020

13. 나는 오늘도 마늘을 깐다.

프리랜서로 살아남기

근래 들어서 가장 자주 하고, 익숙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있다면 마늘을 까는 것입니다. 쑥스럽게도, 저는 요즘 야채 다듬기에 빠져있습니다. 프리랜서를 시작하고 생긴 습관입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야채 다듬기가 딱이더라고요. 




오늘도 깝니다. 마늘


언제부턴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이 하고 싶어 졌습니다. 주로 일이 없는 시기에 그랬던 거 같습니다. 집중을 하고 싶지만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그랬고요. 그럴 때마다 야채를 한가득 사서 집에 와서 며칠 동안 다듬습니다. 파를 다지고, 양파를 미리 채 썰고, 당근을 잘게 썰고, 마늘을 까서 빻고.. 하고 나면 하루가 꼬박 지나갑니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을 침대에 맡기면 어느새 잠듭니다. 


코로나 19가 터지고 저는 일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유일하게 하는 거라곤 한 업체의 바이럴 업무 외에는 없습니다.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그 외에는 프로젝트와 외주를 따내기 위해 PR 하기 바쁩니다. 간간히 작품을 다시 쓰고 있고, 예전 거래처들과 소소한 농담을 하면서 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하루가 흘러가긴 하지만 소득은 없습니다. 집에서 삼시 세 끼를 다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고양이 똥을 치우고, 여러 번 쓸고 닦아도 허전한 마음을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마 오늘 하루도 제대로 벌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책임보다 더 무서운 

죄책감이라는 채무

프리랜서를 시작하고 단 한 가지 유일하게 지키는 건 '남에게 기대지 말자'였습니다. 혼자 생활하는데 드는 돈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숨만 쉬면 나가는 게 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 먹기가, 커피 한잔 얻어먹는 게 자괴감으로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달은 크게 벌기도 하고, 어떤 달은 쪼그라들 때마다 아등바등 개미처럼 잔고를 채우기 시작했죠. 그 덕에 남들에게 밥 한 번씩은 턱 하고 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다시 저는 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전락하는 거 같아서 말이죠. 책임보다 더 무서운 게 스스로에게 드는 죄책감이라니. 다달이 나가는 이자 보다 더 무서운 채무였습니다. 봄 이후부터는 거의 잔고가 항상 아슬아슬한 위기에 자주 처했습니다.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은 괜찮다면서, 그동안 네가 잘해줬으니 우리가 살 수 있다며 먼저 카드를 내밀었지만 제 스스로가 허락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든든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제 욕심이 자꾸 먼저 떠올랐거든요. 결국엔 한 친구 앞에서는 맥주를 먹다가 울기도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솟구칠 때마다 잠도 안 자고 여기저기 제안서를 돌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초저녁에 두어 시간 자고 다시 새벽을 달리는 식으로 몇 달을 지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주는 칼질

하지만 통장이 가난한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조금의 숨도 돌리지 않고 여기저기 가쁘게 달렸는데도 제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몸만 더 아팠죠. 생각해보면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결된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좀처럼 풀리지 않던 미팅을 하고 돌아오던 길, 우연히 대파가 세일하는 걸 봤습니다. 그 옆에 마늘도, 당근도, 양파도 전부다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더라고요. 홀린 듯이 야채들을 잔뜩 담았습니다. 집에 가서 볶음밥을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을 봤습니다. 맛있게 볶음밥을 해 먹고 나니 손질하지 않은 나머지 야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야채를 보고 있자니 꼭 제 마음 같았습니다. 


다 먹고살자고 했던 일들인데 왜 내 일만 이렇게 흙투성이인지. 언제쯤 상황이 나아질지, 가늠할 수 없겠더라고요. 가장 좋아해서 선택했던 글 쓰는 일이 이렇게 생계까지 망칠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나니 눈물이 퐁퐁 솟구쳤습니다.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울면서 먹었습니다.


꾹꾹 부은 눈을 누르고 앞치마를 둘러맸습니다. 그리고 야채들을 하나씩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용도에 적당하게 쓰일지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칼질을 했죠. 사각사각 탕탕, 사가가 각 탕탕 소리가 조용히 작은 원룸에 퍼졌습니다. 울컥 올라올 거 같던 눈물도 칼질을 하는데 집중하니 쑤욱 내려가더라고요. 다듬고, 썰고, 깎고.. 여러 차례 반복하고 나니 먹기 좋은 크기가 되었습니다. 


통에 하나씩 넣어 분리를 해두고 나니 어느새 새벽이더라고요. 그렇게 끝날 거 같지 않던 하루가 고작 야채를 좀 다듬었다고 훌쩍 가있었습니다. 개운하지 않던 마음이 이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웃고 있었고요.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마늘부터 까자

어제 저는 마늘을 깠습니다. 한 망 정도를 사서 저녁 늦게부터 깠습니다. 


마늘 한 개에 들어있는 알의 개수는 아 가늠할 수 없습니다. 8개 구나 싶어서 열어보면 9개, 10개씩 속 안에 작은놈들도 스멀스멀 나오거든요. 잡았다-! 요놈! 하는 마음으로 깔끔하게 다 깎아줍니다. 손질은 한번 한다고 되는 놈들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껍질을 건드려야지 뽀얀 마늘 속살을 볼 수 있거든요. 그때 그 희열감!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프리랜서의 삶의 방향도 마늘 까기 일지도 모릅니다. 깠는데 9개 일수도 있고, 10개 일수도 있는 거. 혹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썩은 것일 수도 있는 거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고 또 까다보면 수북하게 쌓여있는 마늘을 볼 수 있습니다. 꽉 차고 실한 놈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요. 


항상 늘 일이 풀리지 않으면 저는 무언갈 더 하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풀리지 않는 일을 풀기 위해서 다쳐가면서 하기도 했죠. 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에 항상 목숨까지 내놓을 순 없다는 걸 알았죠. 때론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결되기도 한다는 걸 요즘 들어 놓쳤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마늘을 깝니다. 수북하게 쌓일 마늘을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오늘도 내가 먹기 위한 마늘을 이렇게도 두둑하게 쌓았구나 싶으면 죄책감은 조금 가라앉습니다. 적어도 마늘을 깐 나 자신에게 "오늘 참 잘했다, 마늘도 까고 말이야!" 하면서 칭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여러 번 칭찬하고 나면 내일은 꼭 풀릴 수 있는 일이 하나정돈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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