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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은 Sep 07. 2020

14. 담백하게 거리두기

프리랜서로 살아남기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2.5단계로 변경됐습니다. 상황이 나아진다 싶으면 뭔가 하나 터지고, 또 낫겠다 싶으면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일거리가 떨어진 저는 항시 잔고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영업 모드입니다. 쉽지 않지만, 쓴소리에도 입에 침 한 번 바르고 하하호호 웃기도 합니다. 


"아 예... 그렇긴 한데, 하하하"


그러나 허허실실 웃다가 저는 웃음을 거둬내고 제 발등을 찍어버립니다.


"내용, 잘 들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 제안 주신 점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제 능력에서 소화해내기 힘든 프로젝트라는 판단이 조심스레 듭니다. 다음번에 좋은 기회를 뵈었으면 합니다."


말도 안 되는 페이를 제시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돈이 너무 적네요'라는 말 대신 아주 길게 말을 돌려서 얘기합니다. 주는 대로 일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배부른 소리다 라는 말을 들을테지만 저는 그래도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진 않습니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적어도 생태계는 지킨다. 


어떤 사람들은 제 페이가 '쓸데없이 높다', '뭘 잘 몰라서 그러는데'라고 서두를 꺼내곤 합니다. 싸게 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입장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터무늬 없는 페이를 제시하진 않습니다. 다만, '위험 부담 책임 비용'까지 책정해서 제시할 뿐입니다.


얼마나 실력이 뛰어나길래 그런 비용까지 산정하냐고 한다면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모든, 어떤 이야기든 끝내 마지막에 남는 건 책임자입니다.


클라이언트가 짧은 기간 내에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에 자신의 직원 대신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이유는 '저비용 고효율' 업무 진행을 위함이 큽니다. 결괏값을 뚜렷하게 받고 싶기 때문인 거죠.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큽니다.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시, 혹은 프로젝트가 망한다면, 클라이언트의 책임을 지워낼 수 있는 적당한 방패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설령 클라이언트 요구로 인해 어그러지는 경우가 생겨도, 프리랜서는 클라이언트를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당신에게 돈을 많이 준 이유는 위기의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막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비단 규모가 큰 행사나 프로젝트가 아니어도, '그러려고 당신을 고용한 게 아닌데..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지 않네요'라는 말은 쉽게 나옵니다. 혹은 원하는 기대치가 나왔더래도 말이죠. 그래서 프리랜서는 프로젝트 완수 비용을 제대로 받는 경우가 드뭅니다. 최근에는 고용법이 강화되고, 사전에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하는 프리랜서들이 늘어나서 페이를 받지 못하는 사례들은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간에 짤리면 그만인 파리 목숨인 게 프리랜서의 현실이 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냥 돈 다 줄 테니 여기까지만 해주세요'

'아니 그러려고 당신을 고용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대금을 다 치를 수가 없어요'


돈 받을 때쯤 되면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숱하게 많이 들었습니다. 가지각색 이유로 대금을 치르지 않은 업체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종종 마음 착한 프리랜서들은 기다려달라면 하염없이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착할 필요는 없다.

클라이언트와 착한 거리두기


프리랜서가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해주는 호구가 될 순 없습니다. 내 노력과 적어도 투자한 시간만큼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일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책임비용까지 산정해서 제시합니다. 적어도 할당받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일했으며, 요구조건을 다 들어줬고, 최상의 작품을 내놓았다는 의미를 산정한 비용인 셈입니다. 


자존심이 밥은 먹여주진 않지만 프리랜서 생태계는 지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노력한 대가만큼은 돌려받을 수 있는 발판을 누군가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후배가, 내 지인이, 내 친구가 프리랜서로 일할 때 보장받을 수 있는 대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테고요. 


회사들이 문을 닫는 요즘. 제 일거리는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좋은 소식이 있지만 이 또한 열정 페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담백하게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입에 침을 열심히 발라가면서 허허실실 웃는 게 다지만, 이게 제가 생태계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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