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이야기
여행에서 느낀 일이 아니더라도 뒤죽박죽 생각이 복잡할 때는 글을 적는다. 나는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좋다. 고맙게도 요즘은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제법 늘었는데, 모순적이게도 그러면서 솔직한 글이나 편한 글을 적기 어려워졌다. 시간을 내서 잘 쓴 글만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대를 준 누군가에게 실망을 선물하기 두려워서일까. 절대로 쓰지 않을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여 둔 지금도 나는 같은 글을 여러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어떻든지 간에 나는 나대로 살 거라더니,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나를 실망시키고 있다. 오늘은 조금 더 솔직하게 적어 봐야지.
나태해졌다. 노력의 기준은 본인 스스로가 정하는 거라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다 쏟아부어 노력했을 때 넘어지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글을 적어 보려는 지금의 나는 게으르다. 아침 6시면 눈을 뜨고 새벽 조깅을 나가던 여행 초반의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오후 늦게 해지기 전 조깅을 뛰겠다고 하더니만 이제는 영상 편집이 우선이라며 오후 조깅마저 생략하곤 한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고, 멕시코에서 회사 생활을 할 땐 그 짧은 여가 시간을 쪼개 쓰길 그렇게 잘 하더니, 온종일을 계획하고 살자니 계획형 인간이라고 자부하던 나에게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를 그만두면 내 시간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프리랜서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의지가 약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지쳐, 괜찮으니 조금 쉬어가도 돼.”라는 달달한 당근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아직은 채찍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니까.
편견 없이 세상을 보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여러 번 편견과 관련된 글을 적었지만 여전히 편견으로 가득한 일상에 있다. 어제만 해도 르완다에서 첫날, 예쁘게 깔린 도로에 쓰레기 없는 길거리에서 200m마다 경찰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치안 상태를 보며 “여기 아프리카 맞아?”라는 말을 내뱉고는 흠칫 놀랐다. 마치 아프리카는 그러면 안 된다는 듯한 편견 가득한 말투. 이렇게 되기까지 열과 성을 다 한 누군가의 노력을 말 한마디로 전부 폄하해버리고 말았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편견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직접 경험에서 일 수도 있겠다. 편견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싶지만 경험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것 참. 마주하는 일들을 오롯이 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단 스스로 자각하며 새로운 경험 속에서 편견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겠다. 그래, 그게 내가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이유였으니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23년 상반기도 끝났다. 최근 유튜브 라방에서 한 구독자가 이렇게 물었다. “처음 유튜브 하실 때 어떤 컨셉으로 계획하고 하셨어요?”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그냥 나를 보여주고 싶었어요.”였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고 싶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걸으려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와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싫어하는 일보단 좋아하는 일이 많은 사람. 오르막길에 서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내 속도로 꾸준히 가는 사람. 돈보다는 시간을 더 가치있게 사용하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몸소 실천하는 사람. 누워있는 시간보단 움직이는 시간이 많으며 타인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사람. 게으름과 나태의 편함을 항상 경계하고 꿈을 좇으며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후회 없는 노력으로 한참을 달려왔다 생각 들면 한 번쯤은 주변을 돌볼 줄 아는, 스쳐가는 인연에 애쓰기보단 곁을 지켜주는 이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 작은 감정 변화 하나에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며 모난 부분마저 둥글게 감싸 줄 수 있는 사람.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도 그럴 수 있지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 살아가는 사람.
그래,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대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