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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Nov 14. 2016

가을祭

풍경에 대하여


<이미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이 풍경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내게는 이 풍경이 마치 하늘의 첫 번 째 미소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를 밖으로 끄집어 내놓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과 이 돌의 절규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다 무용하다는 것을 이 풍경은 내게 확신시켜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이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듯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는 시프레 나무 바로 그것이 ‘이치에 맞다’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 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그것은 나를 저 극한까지 떠밀어간다. 세계는 분노하지 않은 채 나를 부정한다.>  


까뮈의 산문 ‘사막’에서 나온 글이다. 소파에 반쯤 누워서 읽은 김화영의 산문 '여름의 묘약'에서

카뮈의 이글을 만나고 나는 뭔가 내 안에서 소생하는 에너지를 느낀다.  말랐던 마음이라는 땅에 촉촉한 보슬비가 내리는 느낌이랄까, 구름과 안개가 적당하게 섞인 한낮의 어둑함.... 공기가 지닌 습기.....가 건조한 마음에 스며드는, 글이 주는 에너지는 가볍고 보드란 호흡처럼....청랑한 숲에 들어선 것처럼 정신을 깨게 한다.  

카뮈는 로르마랭에 노벨상 상금으로 집을 장만한다. 그리고 빈집...가구하나 없이 텅 빈 집에서 그는 여러 시간동안 우두커니 서서 포도나무의 붉은 낙엽들이 거센 바람에 불려서 이방 저방으로 날아드는 것을 바라본다.

몇 줄의 글안에 존재하는 오래전 사람 카뮈는 기이하게도 내가 실제로 바라본 어느 풍경을 그린 시보다 욱 시적이다. 도저한 가을에 대한 형상이다.  

가을제

가을이 드디어 나무를 정복해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한해 중 가장 화려한 빛깔로 지기 위해 물들어가는 것. 

작은 도서관 가는 수역이길에는 은행나무가 그득하다. 

초록은 노란 잎으로 변하기 위해 먼저 연두의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서서히 노란색으로 물들어간다. 색으로 세상을 건너는 나무들의 세상ㅡ

어쩌면 한해 중가장 내밀한 부분을 가장 깊게 보여주며 안녕을 고하는....

그 그윽한 번짐들은 얼마나 조촐히 아름다운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아름다움 탓만은 아니다. 홀로 가야만 하는 저뭄....때문일 것이다.  

가을은 사라짐으로 머물지 않음으로 손을 모으게 하고 음을 살피게 하며

성찰의 시간으로 내 슬픈 영혼을 들여다 보게 한다.  

어제 깊은 밤 전주로 조문을 다녀왔다.

여러 명이 타고 있는 차안에는 그 어디에도 죽음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직 여든도 안 되었는데 겨우 일주일 아프다 가시니 자손들이 서운하겠네....

나비처럼 몇 마디 날다가 죽음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소소하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오메 단풍이네......로 돌아왔다.  

죽음이라는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문자 생의 마지막 관문이자 

도무지 경험해볼 수 없는 그 피안의 세계는  오직 철두철미 죽은자만의 것이다.

그를 미스하거나 애도하거나 혹은 탄식한다 할지라도결국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슬픔, 다시 볼 수 없다는.....내 감정의 결과물일뿐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느 땐가는 너무도 확실하게 닥쳐 올 그 거대한 생의 장막이

타인의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내 죽음도 그러리라....

하물며 죽음이 이처럼 가볍다면 삶도 또한 가볍게 여겨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언제나 삶의 무게는 우리의 허리를 휘청이게 하며 짓밟기조차 한다. 

 홀바인의 ‘대사들’은 실존했던 젊은이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그들이 얼마나 능력 있고 지적인 사람인가에 대한 표현으로 온갖 상징물이 가득히 들어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유한한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왜상..왜곡된 해골이 그림 중간 하단에 그려져 있다.

이 해골은 가벼운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심하게...어느 한 지점에 서면 아주 선명한 해골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지점에 서면 나머지 사물은 전부 왜곡되어 보인다.

수려하디 수려한 삶과 죽음에 대한 비유가 아닐런지. 

한그루 나무에서도 여러가지 색들이 교직되어 믈들어 간다.    

꽃과는 또 다른 화려한 단풍이 깃든 숲은 호흡마다 색의 향기를 뿜어낸다.  

복자기 나무의 단풍은 초록도 아니고 노랑도 아니고 빨강도  아닌 그렇다고 흔한 주황도 아닌 딱 저만의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참나무 군들이 어린아이의 안녕처럼 가볍게 갈메빛으로 물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군데군데 자작나무 노오랗게 ....젊은아이들 쉬 돌아서듯 물들어가는것과는 달리 

복자기 단풍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느리고 완만하게 그러나  아름답고 고급하게,

마치 감추어진 홀바인의 해골을 품고 있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원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와는 비교할수도 없이 먼데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길들여진 눈....이라고 단순히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 먼데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득해지고

그러면서  눈이 깊어지지 않았을까...  

가을숲이 지기위해 저토록 아름다워 지듯,

그렇다면 우리도 혹시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길안에 서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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