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예수님께 배워야 할 정신과 심리상담 노하우

에수님의 마음매력 닮아보기

by 통통샤인머스캣

내 주위에 정신과 의사로서 훌륭한 삶을 사시는 선생님들이 참 많이 계시지만, 예수님은 보면 볼수록 훌륭한 정신과 의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예수님이 정신과 의원을 여셨다면,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의 진료철학을 추구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그것과 다 바꾸겠다고 했지만, 필자는 예수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내 전문의 면허를 다 드릴 용의가 있다. 전문의 면허가 대단한 것이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바꿀만한 것이 오랫동안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직은 면허만한 게 없어서이다. 사실 초라하게도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예수님이 훌륭한 정신과 의사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했었던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 어부였던 그들의 직업적 정체성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소중한 가치에 다가가시며 변화의 동기를 끌어내셨다. 스티브 잡스도 존 스컬리 펩시콜라 사장을 애플로 스카우트할 때,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며 보내실 건가요? 아니면 저와 같이 세상을 바꿀 기회를 갖길 원하십니까?”라고 가치 기반의 예수님 뉘앙스로 그를 설득했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열망인 마음매력을 찾아 그들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비전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저마다 다른 제자들의 독특한 마음매력의 정체성을 찾아 마음매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훈련을 시키셨던 것이다. 원래 모자란 사람을 뽑아서 온전케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대가이며 실력자일 것이다.


영화 선오브갓 Son of God


그런 예수님은 어떻게 자라셨을까? 예수님의 성장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성장 구절은 딱 한 구절로 표현된다. ‘예수는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신체적. 지적, 영적, 사회적, 감정적 영역에서 성장하셨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셨다고 나온다. 말구유에서 태어났던 예수님은 아버지를 일찍 잃었던 소년 가장으로 30세까지 목수로 살면서 줄줄이 딸린 어린 동생들을 키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고 한다. 이후에 3년 동안 흔들리는 배 속에서 주무실 정도로 치열하게 사셨으며,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려 했으며, 어머니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부탁하며 아들로서의 책임도 다하려고 하셨다. 그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군중들을 향해서도 기도하셨으며,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질문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하게 삶을 사셨으며,“다 이루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셨을까? 정신과 의사는 내담자가 삶에서 무엇을 이루기를 도와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무엇보다 본받고 싶은 점은 예수님의 통찰력 있는 지혜와 공감능력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의 황금률이라 불렀던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에서 잘 표현된다. 예수님은 당시 지배계급으로부터 세리와 창녀,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받으셨지만, 차별을 받았던 사마리아인, 사회의 힘없는 약자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시며, 그들이 책임감 있게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의 적절한 비유를 통한 탁월한 설명도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가령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쉬운 비유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마가복음 10:14~16).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어린아이의 특성은 무엇일까? 수용성과 현재 순간에 충실함이 아닐까? 현재의 마음 챙김 연구를 비롯한 제3동향 인지행동치료에서 너무나 강조되는 부분이다. 어른이 갖지 못한 아이들의 현재를 즐기는 태도에서 행복을 배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비유는 이렇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느니라

정신과 상담에서 은유 메타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관계 구성 이론이 언어와 인지에 대한 귀납적이고 기능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엇을 그 어떤 또 다른 무엇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능력을 밝힘으로, 언어의 상징적 관계망의 맥락을 변화시키는 효율적인 치료 접근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 비유는 인간 행동의 수반성, 외적 행동뿐 아니라 내적 행동을 조절을 통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맥락을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행동을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결국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일깨워주는 동기부여적 상담의 정수가 들어있는 통찰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대니얼 시걸이라는 학자가 언급한 ‘유연하고, 적응적이고, 일관되고, 활기차고, 안정적일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은 다 갖추셨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자 집중하셨던 분이시다. 당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대중에게 그를 먼저 소개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세상의 짐을 무겁게 지고 가는 사람들과 당시 율법이라는 종교적인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도 쉼과 힐링의 메시지를 던지셨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용 전념 치료에서 강조하는 심리적 유연성과 맥락으로서의 자기, 탈융합일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세상의 짐을 지고 수고로이 살아가는 인간도 진리를 떠나선 살 수 없는 그런 고귀한 존재로 대하셨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3년을 동고동락했었던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팔렸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는 세 번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인간적인 굴욕을 당하셨지만.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셨다.


예수님을 탁월한 정신과 의사로서 손색이 없는 장면을 하나 꼽자면, 치욕적인 기억을 갖고 참담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베드로를 만나주시고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시몬 베드로의 트라우마 치료 장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시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5-17)


베드로의 입장에서 선생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사건은 기억하기 싫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수제자라 할 수 있을까?’ 베드로의 마음에는 ‘나는 완전히 망가졌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다.’ ‘나는 쓸모가 없다.’와 같은 부정적인 믿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추측은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로부터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을 받을 때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는 회피적인 행동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생선을 굽는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직접 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말을 통해서 외상적 기억과 관련된 부정적 믿음을 교정하신 의미심장한 치료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2천 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치료장면이라 보인다. 외상적 기억을 비슷한 분위기 상황에서 처리해주려는 극적 장치가 담긴 현대의 치료 장면과 흡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을 했을 때와 유사한 거의 추궁당하는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긍정적인 고백을 이끌어내는 질문을 하셨고, 베드로는 2번의 망설임 끝에 마지막에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백한다.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 뇌의 두정엽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믿음을 주입시켜주시고 강화시켜주신 기회를 제공하셨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괜찮아'라는 것을 넘어서 '너는 나를 사랑했지, 지금도 사랑하지. 앞으로도 사랑하겠지. 내가 다 안다'라는 경험을 통해 베드로 안에 있는 숨겨진 마음매력을 다시 기억시키고 트라우마 기억을 치유의 기억으로 성공적인 덮어쓰기를 해 주신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효과적으로 다가가 치유하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이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시고 공감하시고, 치유하셨던 정신과 의사이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이게 그냥 누군가의 상상력이 담긴 픽션일까? 연출된 픽션이라고 해도 2천 년 전에 이런 가상현실로 외상적 기억을 처리했다는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더구나 배은망덕한 제자로 남을뻔한 그의 인생은 치료효과를 본 덕택인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부인하며 도망가는 함량 미달의 제자들에게 충분히 좋은 엄마가 사랑스러운 자녀를 바라볼 때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 따뜻한 시선은 내면의 시선을 변화시킨다. 베드로처럼 잠시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시선과 사랑의 손길을 느낀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한 뜻이 있다고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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