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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Jul 28. 2017

나는 일쩜오세다

[ 2 ]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아아!”


캐나다 토론토의 한 중국 식당. '매화방' 안에 유산슬, 깐풍기, 세숫대야만 한 짬뽕이 거나하게 차려진 테이블이 보인다. 벌써 몇 차례 앞접시가 오갔는지 곳곳에 국자가 꽂혀있다. 삼십 대 초반의 다섯 사람이 나를 올려다보는데 웃는 표정 하나 없다. 아, 열심히 손 인사하는 팀장님 빼고.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했다는 말에 나는 시간 확인을 잘못했다는 변명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새빨간 불짬뽕이 무색하게 싸늘한 분위기다. 나는 한 시간이나 늦었고 구린 첫인상을 남겼다.


한인 유학생을 위한 콘퍼런스 준비 차 행정팀 봉사자들이 처음 모인 자리였다. 음식을 주춤주춤 맛나게 먹으며 조금씩 분위기 파악을 했다. 무채색의 표정은 내 탓만이 아닌 듯하다.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몇몇은 아는 사이지만 몇몇은 초면이다. 소극적인 사람들 가운데 서로에 관해 묻는 것은 팀장님뿐이었다. 화제를 꺼내는 이도, 신상 정보를 공표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잘 짜인 예능 프로그램에 나만 대본을 못 받은 것 같다. 팀장님은 사회자가 되어 사람들의 연결점을 찾아내려 고군분투하였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나는 당황했다. 카톡방에서는 이모티콘 날려가며 서로를 살갑게 대한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맏이의 저주에 걸린 나는 인생 최초로 막내 노릇을 하겠구나 하며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이런 우쭈쭈 저런 우쭈쭈를 받아가며 언니 오빠들 사이를 누비겠거니 안일하게 기대치를 올려놓은 내가 나쁘다. 노력하는 팀장님을 본받아 분위기를 띄우려 해도 주제넘은 리액션은 받아주는 이 하나 없이 땅바닥에 버려진다. 아, 바닥 찹네. 이 어색한 분위기가 생소하지 않아서 짧은 인생을 반추해 보았다. 그래, 이건 고등학생 때 다른 한인 공동체에서도 느낀 적이 있는 차가움이야.




이민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서양인은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속이 차갑고, 한국인은 그 반대다. 겉으로는 살갑다는 캐나다인은 어딜 가나 모르는 사람끼리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다. 담소 small talk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는 사이가 아니어도 말을 걸면, 기꺼이 반응해주며 대화를 이어간다. 서양인 표 리액션이야 워낙 빤타스튁 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도 날씨니 뭐니 기본 탑재된 주제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대신 접점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처럼 마음마저 금방 결합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담소 후에 각자의 길로 쿨하게 돌아선다. 한국 사람은 같은 사회적 울타리 안에 있는 상대방 얼굴을 몇 번 보거나 공감하는 부분을 찾으면 그를 '남'이 아닌 '우리'로 인식한다. 캐나다에 와서 이 공식에 오류가 떴을 때, 문화충격이 가장 컸다. 분명히 같은 반이고 인사도 말도 몇 번 주고받았는데 복도에서 만나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 버리는 황당한 일을 몇백 번은 경험했다.


그러나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친해지고 나면 살갑게 챙겨주고, 잊을만하면 연락도 넣어주며 바쁘지만 친구로 살아간다. 한국인인 나의 관점에서 우정이 시작되는 예상지점이 빗나갔을 뿐, 서양인이 원체 차가운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캐나다에서는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면 배경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담소 문화에게는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유지해 주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비커 속의 개구리처럼 캐나다 온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식당 모임에 온 봉사자는 대부분 나이가 어느 정도 차고 캐나다에 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인이 처음 모이는 자리는 조금 춥구나. 이런 온도 차를 느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1.5세로 변해버린 자신이 생소하다.




"야, 그 사람 한국 연예인 이름을 잘 모르더라고. 2세인가?"
"무슨 소리야? 완전 포브 FOB* 던데."

*Fresh Out of Boat, 이민 온 지 얼마 안된 사람


북미 교민 사이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지칭이다. 이민의 물꼬를 튼 부모님 세대를 1세라 하고,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의 자녀를 2세라 한다. 이 사이에 어정쩡하게 껴 있는 것이 1.5세다.


사회와 대중문화는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산 부모님과 새로운 문화권을 토양 삼아 자란 자녀들 간의 언어문화 장벽과 세대갈등을 주로 조명한다. 1세와 2세 각자의 정체성이 극명하게 다른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2세는 현 사회 시스템이나 대중문화 코드에 익숙하므로 갈등은 대부분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 캐나다와 같이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나라에서는 아주 흔한 현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5세는 다양한 이유로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캐나다로 건너와서 문화 물갈이의 성장통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2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양다리에 다리가 찢어질 판이다. 캐나다 사람들과 기본적인 소통은 문제없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오래된 게임, 음악가, 추억의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한국에서 막 건너온 유학생들과 어울리자니 그들이 민감하게 보는 용모나 고단한 한국 살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괜히 미안해진다. 그렇게 1.5세 문화권이 생겨났다. 1세와 2세 사이의 스펙트럼을 더 세세히 나누자면, 1.5세 중에는 아직 캐나다 물이 덜 든 1.3세가 있고, 2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예능과 드라마에 목매는 1.8세 정도가 있겠다.



나는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딱 1.5세다. 중학교 2학년 어둠의 시기를 영어권 나라에서 보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10학년이라는 이름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한두 시간이면 쓰는 에세이를 한나절 걸려 완성하면 감지덕지했다. 글 안 써도 되는 과제를 내주시는 선생님을 거의 경배했다. (글 이외에 포스터, 그림, 게임보드, 신문, 광고 등 자신이 선택한 매체로 과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다양한 재능과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글쓰기라는 방법론의 한계에 묻히지 않도록 수업 시간에 배운 지식을 다방면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교육전략이었다. 나는 무조건 그림. 영어를 한 자라도 적게 쓰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개인 발표는 왜 그리 많은지, 발표 전날 빡센 기도를 하느라 고등학생 시기에 신앙심이 최고도 곡선을 그릴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1.3세나 1세를 만나면 그 온도 차에 화들짝 놀라며 새삼스레 내 정체성을 돌아보게 된다. 모임이 파하자 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걸까 걱정도 되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국 문화는 나이에 민감한데 그것에 너무 무신경했나? 원체 조용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친목 목적으로 모인 날이지만 일로 시작된 모임이라 점잖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글을 쓰는 이유는 걱정 1할에 취미가 8할, 위로받고 싶은 마음 1할이다.


내가 막내의 환상에 눈이 멀어 첫날부터 너무 빠른 진척을 원하기는 했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별난 게 아니야. 누군가가 잘못한 게 아니라 서로의 온도 차이를 느낀 것뿐이야. 다음에 만나도 살갑게 굴 수 있도록 마음 정리를 해 두자, 라고.



글, 그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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