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아단부카(3)

by 상재

6.


이틀 후 성주 어른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으로 성주를 모셨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 하자 아버지가 누운 채로 말했다.


“바투르, 총모자 어른께서 말총이 더 필요하다더구나. 얼른 가져다드리거라.”


하루 종일 누워있는 아버지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했지만, 손님이 오셨는데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기도 모양이 이상하고 한편으로 할머니들을 뵌 지 오래되어 조용히 집을 나왔다.


곧장 목마장으로 가서 말총을 채집하고 다듬어 건넛마을로 가자 총모자 할머니가 말했다.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괜한 수고를 했다. 하여튼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


순간 등골이 오싹하여 할머니를 등지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성주 어른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나는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가 누워계신 아버지 옆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병문안을 오셨다. 고맙기도 하지. 이제는 만호도 아닌데 성주께서 각별히 생각해 주시는구나.”


“총모자 할머니는 말총이 아직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미리 챙겨주면 좋지 않겠느냐. 바투르, 아비가 많이 피곤하다.”

말하기 싫은 티가 역력하여 하릴없이 방을 나왔다.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른 불안감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나갈 동안 아버지는 목마장을 들락거리며 평소처럼 행동하셨다.


때때로 아련한 눈빛을 하고 나를 지긋이 쳐다보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일상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아직 회복이 덜 되어 그런가보다 싶었다.


다만 어머니가 매일 같이 뒷마당 폭낭에 기도를 올렸기에 심상찮은 기분이 들긴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불렀다.


나는 눈을 비비며 터벅터벅 아버지에게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웬일로 깨끗한 옷을 입고 마루에 정좌해 계신 것이었다.


“바투르, 이제부터 아비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먼 옛날, 고려의 땅엔 본래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단군은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조선을 평화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이 아비는 비록 보잘것없지는 처지이지만 탐라의 군민을 이롭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것이 아비가 맡은 소명이라 믿고 있단다. 바투르, 사내란 무릇 책임을 져야 한다. 작게는 가족과 벗을 지켜야 하고, 크게는 자기의 신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 명심하고 평생 잊지 말거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조선은 뭐고 단군은 뭐란 말인가!


다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멀뚱멀뚱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 성주 어른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그 기세가 이용장 목사가 장정을 이끌고 올 때와 비슷해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성주 어른이 그럴 리가 없는데, 성주 어른은 아버지를 챙겨주는 좋은 분인데.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문 만호, 준비는 되었소?”


성주 어른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자 아버지는 서둘러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평소 품에 간직하시던 금패였다.


빙그레 웃는 아버지의 표정이 왠지 서글펐다. 아버지는 한동안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숨이 막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성주 어른을 보았다.


“아내와 탐노를 부탁드리오.”


성주 어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차분히 일어나 성주 어른을 따라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아버지를 따라나서려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는 것이었다.


“어머니, 놔주세요. 아버지는 어딜 가시나요?”


어머니는 대답하는 대신 더욱 거세게 끌어안았다. 떼어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곧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흐느끼고 있었다. 왜일까. 왜 우시는 걸까.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의 소식을 기다리며 마을 어귀에 나가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도 기별이 없어 초조해지는 찰나에, 석 삼촌이 말을 끌고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석 삼촌은 착잡한 표정으로 땅만 쳐다보면서 걸었다. 나는 석 삼촌 앞을 가로막았다. 울화가 치밀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는요? 왜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에요?”


석 삼촌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탐노야, 미안하구나. 아, 이 죄를 어찌 씻을 수 있을까. 내가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면 무사하셨을 것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내고야 말았구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이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석 삼촌은 아무런 설명도 못하였지만 아버지가 어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 성주 어른이 아버지를 끌고 갔는지, 아버지는 왜 순순히 따라갔는지, 삼촌들은 이용장 목사의 목을 벨 때처럼 나서지 않고 도대체 왜 가만히 물러났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알고 계셨던 거죠? 어째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아버지를 말렸어야죠!”


어머니는 벽에 바라보고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귓가에 전해졌다.


방문을 닫고 마당을 가로질러 올레를 뛰쳐나왔다. 엊그제가 보름이어서 달이 무척 환했다.


나는 밤길을 달려 목관아에 도착했다. 객사 계단 위 횃불 사이로 성주 어른과 문서봉 판관의 얼굴이 너울거렸다.


“영공, 시절이 수상한 탓에 탐라는 수령을 잃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소. 군민에게는 마땅히 어버이가 필요하지 않겠소? 조정의 명을 기다리기에는 한시가 급하니, 본주는 탐라 군민을 대표하여 영공을 권지목사(權知牧使)로 추대코자 하오. 동의하시오?”


성주 어른의 말이 끝나자 문서봉 판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 어른은 문 판관에게 나무상자를 건넸다. 이윽고 상자를 확인한 문 판관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탐라는 반적의 수장을 죽이고 투항하였으므로 전하께서도 갸륵히 여기어 용서하실 것이외다. 내 반드시 그리 만들겠소.”


상자에 무엇이 들었을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저것을 꼭 봐야겠다.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 따위가 온몸을 거세게 휘몰아쳤다. 눈물방울이 귓가로 흘러 날아간다.


사람들이 막아섰지만 모조리 뿌리치며 나아갔다.


기어코 계단 앞에 도착하자, 성주 어른이 손을 들어 나를 붙잡는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탐노야, 꼭 보아야겠느냐?


옆에서 문서봉 판관이 말린다. 성주 어른, 아니 됩니다. 탐노는 고작 아홉 살에 불과합니다.


성주 어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백성에게 어버이가 필요하듯, 저 아이에게도 아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오. 평생 저 아이에게 속죄하고 또 속죄하여야만 하오. 상자를 내려놓으십시오. 영공, 모두 내가 감당하겠소.”


문 판관이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나는 성주 어른을 봤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성큼성큼 다가갔다. 상자가 가까워질수록 분노는 사그라들고 발은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오금이 후들거린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고 계셨다. 오늘따라 달은 왜 이리도 밝은 것일까.


아버지의 미소가 너무 선명해서 서러움이 복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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