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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범접할 수 없는 문구인의 동선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9월

01


서점엔 종종 외국인이 온다. 예상치 못하게 한국어를 엄청나게 잘해서 진짜 책을 읽는 경우, 친구 따라 놀러 온 경우 그리고 그 외의 경우.


성악 전공의 유학생, 그녀는 석사 과정을 마치기 위해 중국에서 왔다고 한다. 자신의 전공인 ‘성악’과 이곳에 온 목적인 ‘석사’는 한국어로 말해주었지만,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외 한국어는 아직 서툴다. 나의 중국어는 따거, 세세, 이얼싼스가 한계다(물론 성조조차 모른다). 우리의 수준이 비슷해서 다행이다. 그럼에도 제2외국어로 일본어 대신 중국어를 선택했다면 조금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인과 한국인인 우리 두 사람은 대부분 영어로 그리고 몸짓을 섞어가며 어찌저찌 소통을 이어간다.


악보의 음표는 읽어도 한글은 읽지 못하는 그녀는 책 대신 문구류에 관심을 가진다. 문구류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서점에는 단 한 종류의 문구류 코너가 있는데 바로 연필이다. 경도 별로 나뉜 블랙윙 연필과 왁스 함량이 많아 물에 잘 젖지 않는 리라 가든 펜 그리고 밑줄 긋기 좋은 프리즈마 색연필이 있다.

블랙윙 연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색깔마다 경도가 다르다고 말해주자, 그녀는 신중하게 샘플을 테스트하고는 심사숙고 끝에 한 자루를 고른다.


그녀는 문구류를 좋아하는 문구인이다. 자신은 연필깎이가 없어 연필을 깎아줄 수 있냐고 물어 흔쾌히 깎아줬는데 그 연필깎이는 어떤 것인지 묻고, 연필 테스트용으로 놔둔 노트도 마음에 든다며 판매 여부를 묻는다(난 여기서 웃어버렸다. 이러다 서점을 사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중국 부자라면 가능할 수도!).


노트는 절판되어 구입할 수 없지만, 연필깎이는 브랜드를 알려주니 사진까지 찍으며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묻는다. 당장 떠오르는 건 교보문고 핫트랙스.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 지도를 보여주며 장소를 입력해달라고 한다. 나는 목적지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입력한다. 그리고 핫트랙스에 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물론 문구인이라면 그 넓은 곳에서도 본능적으로 핫트랙스를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나는 별안간 한국 문구류 세계에 입문하는 중국 학생의 시작점을 함께 해준 느낌이 든다. 케이팝에 이어 케이북(k-book) 시장을 노렸던 나의 야심 찬 계획을 뒤로하고 케이문구가 빠르게 앞서고 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동행해서 친절히 핫트랙스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아쉬운 마음은 넣어두고 연필을 곱게 깎고, 연필깎이 구입처도 알려주고, 아련한 마음으로 안녕 했는데 서점 마감 시간 직전에 그 학생이 다시 등장한다(ㅋㅋㅋ). 이번엔 또 어떤 문구 이야기를 하게 될까. 하루에 두 번 보니 일단 반갑다.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문구인이라는 내적 친밀감이 쌓여 있어서 아주 편안하게 마주한다.

그녀는 번역기로 나에게 물어볼 것을 준비해 왔는데 화면에는 “가장 가는 연필은 무엇입니까?”라고 적혀있었다(ㅋㅋㅋ). 너무 귀엽다.


성악 전공이라 했으니 뭔가 악보에 박자를 세고, 쉼표를 기록하기 위해 사는 건가 싶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연필을 살 때 그 용도가 궁금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밑줄도 긋고 필사도 하고 그렇겠지만, 집에 연필이 없는 것은 아닐 테니. 그 외에 다른 멋진 용도가 있는지 알고 싶다. 근데 또 ‘이 연필은 어디에 쓰세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어려워서 보통은 혼자 상상만 한다.


첫 만남에서 어떤 연필이 하드하고 소프트한지 이야기를 나눴던터라 그 하드한 연필을 찾는 듯하다. 나는 서점에서 가장 단단한 HB 경도의 연필을 알려주고, 그 학생은 또 열심히 노트에 한자로 테스트하더니 그것을 구입한다.

내가 첫 만남 때처럼 봉투에 포장해 주려고 하자 아, 포장은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연필을 다시 깎아주려고 하자, 그것도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 연필깎이 구입했어요?”라고 묻고, 그 학생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렇다고 한다.

“혹시 교보문고 광화문점 가서 구입했어요?”라고 묻자 맞다고 한다.

아니, 이 추진력, 실행력 존경스럽다.


오후 한 시에 서점에서 연필 사고, 바로 교보문고로 이동해 연필깎이 사고, 다시 오후 일곱 시에 서점에서 연필 구입.

동선이 매우 귀엽다!

그래서 이제는 연필을 깎아주지 않아도 된다. 뭔가 아쉽지만, 충분히 성장해 독립해야 하는 아이를 보면 이런 마음일까 싶다. 그래도 한 명의 문구인이 탄생했다는 것이 더 반갑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을 쓰는 현재, 커플 한 팀이 아까부터 애정 행각을 하며 이 작은 서점 곳곳을 누리고 있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새끼손가락이라는 가는 고리로 연결된 채 이 작은 서점을 30분은 뱅글뱅글 돈 것 같다. 정말 작은 서점이라 서점원은 그들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다. 마감 시간 이십 분을 훌쩍 넘긴 지금, 그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하아.

그들의 애정행각을 억지로 관람한 나의 눈은 누가 보상해 주나!



2025년 9월 13일 토요일

문구인의 탄생은 언제나 반가운 서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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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원의 문장과 책

: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수박 보관법도 그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스밀 수도 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책을 읽는다』 장으뜸, 강윤정 공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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