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신영복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고 신영복 선생, 진보 학계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이자 문학가, 젊은 시절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수감 생활 당시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 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이름을 알렸다. 20년 20일의 수감생활 중에도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책 속에 이런 내용도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20년이 넘는 감옥 생활을 통해 만들어진 사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또한 선생이 말하려는 사소함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서는 비슷한 심정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먹을만큼 먹은 나이가 되어 보니, 일상의 소소함, 가까운 사람과의 교감, 작은 기쁨의 즐거움 등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젊었을 때는 뜻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면 웬만한 일은 전부 일궈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보니 알겠다. 인생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다.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원래부터 많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당해 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영복 선생이 말한 것처럼, 이런 인생의 슬픔은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세월로 인한 무상감과 비애감을 달래 준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우리들은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숯가마에서 익힌 고구마는 남다른 맛을 준다]
나에게는 1년째 매일 감사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거나, 시작할 때면 의식적으로 일기장을 먼저 연다. 놀랍게도, 긴 하루를 열심히 살거나, 책을 읽으며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이라도, 매일 감사할 일은 생긴다는 것이다. 내 인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거나, 행복이 가득하지만은 않지만, 일상의 지루함과 소소한 시련이 번갈아서 찾아오는 평범한 인생 속에서 감사할 일은 차고 넘쳐 있었다. 최근에 벌어진 ‘무안공항의 대형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의 가족을 잃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어제 일어난 ‘야탑의 상가 화재사고’, ‘시장으로 돌진하는 예기치 못한 차량’까지 뜻하지 않은 사고의 희생양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감사할 일이다.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선생에 의하면, 오랫동안 환자들을 치료하며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가를 탐구하였는데, 원인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둘 다 안 느낄 수는 없겠지만, 과도해서 좋을게 없다. 아무리 후회한들 바꿀 수 없는 과거이고, 아무리 걱정한들 피해 갈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점은 이 두 가지가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들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올 한 해를 살아가며 단 한 가지를 다짐한다면,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