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에게 길을 묻다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이상 / 권태 -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 이상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문체로 유명한 작가로 ‘날개’, ‘오감도’, ‘권태’ 등의 산문집을 통해 무의식의 충동과 억압된 욕망을 표현해 냈다. ‘권태’는 1930년대에 쓰인 산문 시 형식의 단편으로, 현대인의 공허함과 정신적 무기력을 절묘하게 그려낸 고전이다. 그는 권태를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적 공허로 묘사하며, 일상의 반복이 불러오는 정신적 죽음을 비판하고, 오늘날의 일상에서 오는 번 아웃이나 무기력과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사람들은 권태를 인간 특유의 감정으로 생각해왔다. 사실 짐승도 우리에 갇히면 무기력해져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품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야생을 하는 짐승들은 권태를 느낄 여유가 없다. 적을 경계하거나 먹이를 찾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짝짓기를 하거나 안락한 서식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평생 직업인으로 일만 하다가 은퇴를 하게 되면, 한동안 해방감으로 즐겁겠지만, 곧 무료함과 무기력으로 권태로움에 빠지게 된다. 어떤 형태의 일이든 일은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삶의 여정 중의 하나이다. 경제적인 수단일 뿐만아니라 나를 존재하게 하는 조건이고, 표식이다. 특히, 직장이나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로 존재감을 드높인 사람일수록 그 허탈감이나 무력감은 더욱더 크다.
권태는 꼭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순간이 다른 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 생긴다면 권태로 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권태에 빠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자극에 대한 욕망은 인간, 특히 남자에게 있어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수렵시대에는 그 이후보다 자극에 대한 욕망이 쉽게 충족되었다. 동물을 추적하는 것도 자극적이었고, 전쟁도 자극적이었으며, 구애 역시 자극적이었다. 과거에 비해 우리가 겪고 있는 권태의 정도는 덜하지만,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다. 우리는 권태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운명이 아니라 자극을 찾아나설 정도의 결단만 있으면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자극적인 삶을 찾아 나설 수 있냐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설 수도 없고, 주어진 일상이 새로움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아침에 눈뜨자 마자 출근하기에 바쁘고, 하루종일 직장에서 시달리다 보면 퇴근시간만 기다리다, 집에 가기 바쁘다. 간혹 친구를 만나거나, 직장 동료들과 회포를 푸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반복적인 일상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자극적인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삶에 대한 무료함과 효능감 부족에 따른 피로와 권태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삶이 단조로워지고, 관계가 다양하지 않고, 지식과 경험을 갈구하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을 때, 삶에 위협이 없고 평온한 상태일 때 자극적인 상황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으면 무력감에 빠진다.
이런 권태는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의지나 동기가 부족해 실행하지 않는 ‘게으름’과는 다르다. 게으름이 주로 의지력이나 자기 통제와 관련이 있다면 권태는 감정적, 정신적 상태로 흥미나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따분하거나 무기력한 느낌을 말한다. 권태는 특정 활동이나 환경에 대해 더 이상 자극이나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반복적인 일상에 지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묘사된다. 따라서 ‘게으름’은 반복적인 일상에 대한 저항으로, ‘권태’는 피상적인 피해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오는 번아웃이 게으름과 권태로 다가오듯이, 은퇴 이후의 삶 또한 일에서 오는 해방감, 피로감 등이 게으름과 권태로 나온다. 죽도록 일만하다 퇴사한 사람은 게으름의 즐거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한 번 맞본 게으름의 즐거움에서 더 이상 일할 의미와 흥미를 느낄 수 없다. 반면 일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과 삶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일이 없는 권태를 죽음보다 더 괴로워 한다. 그래서 가급적 건강이 허락한다면 일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일은 권태를 이기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자극의 추구는 점점 강렬해진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가는 곳마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곳에서 이런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한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중년도 오고 노년도 올 것이다.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은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나이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역할과 일이 정해져 있고, 주어진 역할에 따라 충분히 즐기면 된다.
권태의 어떤 요소는 인생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인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욕구를 표현해왔다. 권태를 이기는 수단으로 인간은 다양한 놀이와 유흥거리를 창조해 냈다. 이처럼 권태는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권태에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황폐하게 하는 것 두 종류가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권태는 약물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고, 삶을 황폐하게 하는 권태는 활기찬 행동이 없는 곳에서 자라난다.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이야말로 즐거움의 필수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격을 느끼기 위해서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나친 자극에 익숙해져버린 사람은 후추를 병적으로 좋아해서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후추를 먹어도, 정작 본인은 별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과 비슷하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버린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나치면 해롭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훌륭한 책들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없는 시기가 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왔다. 은퇴 이후의 일에서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지루함에서 오는 권태로움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행복에 역행하는 지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들어 오는 권태는 가벼운 일상의 변화로 해소되고, 소소한 자극에도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특별히 자극적이지 않아도 되고, 유별난 흥미거리가 아니어도 된다. 오히려 지나간 과거의 흔적에서 건져올린 추억의 한 조각에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의 사소한 것에도 흥미와 자극을 받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