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생

혹은 하나뿐인 내 인생

by 이현선

아마 서울 병원에 처음 입원했을 때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물네 살의 늦봄이나 이른 여름. 이후의 수술을 결정할 검사를 받기 위한 이 삼일 정도의 짧은 입원이었다.

좁은 2인실의 출입문쪽 침대가 내 자리였고 창가 자리에는 목소리가 높고 말이 많은 여자가 있었다.

그때에는 꽤 나이가 많게 생각해서 '저 나이가 되어서 저런 언행이라니' 하고 그녀의 주책맞은 말들을 더 얄밉게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30대 초중반 정도밖에 안 되었지 싶다. 나도 그녀도 젊었다.


나는 동네의 종합병원에 한 번 입원해 본 뒤였지만 여전히 병원 생활 초짜였다. 병원 안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고 맛없는 병원 밥만 성실하게 먹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만 누워있든지 시트의 등 쪽을 일으켜서 기대앉아있든지 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내내 병실을 지키고 있자니 옆 침대의 여자가 뇌종양 제거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간병하는 남편이나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두 번째 인생에 대해 말했다.


"요즘은 유방암 같은 건 암도 아니래. 똑 떼어버리면 그만이라잖아?"


그녀의 뇌종양은 어쨌든 똑 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유방암도 똑 떨어지진 않는다.


"나는 뇌종양이니까 아주 힘들었지. 그래도 이제 두 번째 인생을 얻은 거야. 퇴원하면 두 번째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아야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검사를 마치고 퇴원한 이후로도 그녀의 두 번째 인생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연달아 다시 입원과 수술, 회복까지 내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혼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 병실에서 그녀의 생색에 맞서 내가 더 불행하다고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심 '나도 저런 말을 하는 못나게 병든 사람이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번에 정밀하게 검사를 받으면, 검사 결과가 좀 다르게 나와서 사실은 별로 심각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냥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조금 있었다.


그러나 종종 불안은 적중하고 기대는 빗나간다.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의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둑이 터진 자리로 물이 쏟아져들듯 불안이나 화가 들이닥쳐서는, 머릿속에 빈자리 하나 없이 들어차버렸다.

내 병은 뇌를 좀먹었다. 뇌 안에는 생각이나 마음도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도 마음도 벌레 먹은 과일처럼 뭉그러져버렸다.


문득 화가 났다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가, 남 일처럼 생각이 텅 비기도 했다. 다른 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받아보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수술을 해야만 한다는 말만 다시 들었다.

더 일찍 진단을 받았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아예 모른 채로 그냥 살았더라면 하고 가정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 바보 같은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건 두 번째 인생 같은 건 없다는 것.

인생은 한 번뿐이고, 끝나느냐 이어지느냐의 순간이다.


아무래도 좋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내 인생에서 마음이 그렇게 깨끗하고 평온했던 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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