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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너머 Oct 22. 2023

메리 크리스마스

열대의 이슬람국가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일주일에 두 세번, 아침 일곱시 반쯤 아이 학교 보내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리러 나간다. 이곳에 와서 그래도 꾸준히 하는 일이 그것 밖에 없다는 게 좀 그렇지만, 어쨌든,      

 오늘도 옆 단지 아파트인 시티오브드림을 향해 뛰고 있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던 부부가 산타할아버지 모자를 쓰고 있다. 달리면서 얼핏 쳐다보았더니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창문을 내리고 "메리크리스마스~"하며 손을 흔든다. 나도 한 손을 들어올리며 웃어주고 달리면서 생각하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구나 싶다.   

   

 아파트 로비나 근처 상가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건 11월 중순부터였다. 어느 무더운 날 햇볕 쨍쨍한 길에서 아파트나 상가로 들어설 때 보이는 화려한 트리 장식은 정말 생뚱맞다고 해야하나? 겨울을 살다온 한국인에겐 실감이 일도 안나는데,  민소매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빨간 산타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구나 싶다. 계절의 변화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늘 더운 나라에서 살다보니 사실 시간 가는게 피부로 느껴지질 않는다. 연말이 다가와도 실감이 나지 않고 늘 그날이 그날 같고, 긴장감이 생기질 않는다. 이 곳에 살면서 내가 느끼는 큰 단점 중의 하나다.      


 토요일 오전에 하는 수영강습이 끝나고도 한참을 친구들과 물에서 놀다 들어온 승겸이 배가 고프다고 한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크리스마스라는 핑게를 찾았으니 아이와 외식이라도 해보려고 집 근처 상가로 걸어가는데,  바람이 부는데도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가 올라와 금방 옷이 땀에 젖는다 . 불과 걸어서 5분 남짓한 곳에 있는 스트레이츠키 상가엔 이미 길가 양쪽까지 차들이 꽉 차 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붐빌 줄 모르고 이쪽으로 온 게 잘못이다. 보나마나 여기서 저녁먹긴 힘들겠다 싶었다.  상가 가운데 광장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한 쪽엔 임시로 마련된 아이들 놀이기구에 불이 번쩍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화려하게 크리스마스 분장을 한 어린 아이들부터 젊은이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여러명으로 구성된 남자아이들이 옷을 맞춰입고 춤을 추는 걸 조금 보다가 식당을 찾으러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어딜 가나 자리가 없이 벌써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른 저녁엔 늘 한산하던 펍까지 식사를 하는 가족들로 꽉차 있다.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가면 자리가 비면 연락해 주겠다는데, 포기하고 상가 밖에 있는  한국마트로 갔다. 평소에 승겸이 먹고 싶어하던 치즈 핫도그 한봉지 내가 먹고 싶었던 매운 김치만두 한 봉지 , 인스턴트 치킨 한봉지와 승겸이 들고 놓지 못하는 맛없어 보이는 햄버거 하나까지 사들고 집으로 걸어왔다. 몇 개 안 샀는데 멋진 식당에서 스테이크와 피자를 먹었어도 안 나왔을 금액을 내고 집에 와서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 음식에다 전에 사놓았던 김치국수까지 끓여서 실컷 먹었다.    

   

 아이는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으려면 일찍 자야한다면서 자러 들어갔다. 아직도 산타를 믿는다는 말은 진짜 산타인 엄마를 믿는다는 말일 것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산타를 굳게 믿던 아이는 작년부터 주변 친구들과 형아들이 산타는 부모님이라는 말을 하더라며 그 말이 맞냐고 확인을 하려 들었다. 긴가민가하는 아이에게 산타는 믿는 사람에겐 오고 안 믿는 사람에겐 절대 안오니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에 달렸다고 말해 줬다. 아이는 자신은 의심스럽긴 하지만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굳게 믿는 걸 선택해서 작년에 원하는 선물을 받았다. 올해는 아빠와 이모까지 나서서 산타는 없다고 말하는데도 내가 작년에 했던 말을 내게 되돌려주면서 지금도 자기는 산타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나에게 수없이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선물을 준비하길 바라는 마음일 것으로 짐작했다. 


 나도 좀 고민이 되긴 했으나 결국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려서 선물을 준비할 시간을 놓친 것이다.  그 산타 모자를 쓴 부부를 본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도 잠깐 생각을 했다가 집에 와서는 또 까맣게 크리스마스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오후에 승겸이가 들어와서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생각이 났으나 이미 준비할 시간도 놓친데다 이제 산타 노릇도 그만해야 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날 밤 뜬금없이 보기 시작한 태양의 후예를 보다가 새벽 두시가 다 되어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승겸이가 내 방에도  들어왔다 나가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몇시냐고 물으니 일곱시라고 했다. 아이에게 더 자라고 하고 나도 다시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아홉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승겸이도 다시 잠이 들어 있어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아이가 일어나 방에서 나오면서 실망스럽게 말했다.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안 왔나봐, 새벽에 일어나서 선물을 다 찾아봤는데 없어. 엄마가 산타할아버지라면 선물을 어디다 숨겼을거 같아? 다시 찾아봐도 돼?"     

 아차, 오늘이 크리스마스였지?

 새벽부터 혹시나 하고 선물을 찾으러 다녔을 아이를 생각하니 조금 미안했다.      

"산타 할아버지도 이 더운나라까지 오시려니 힘들었나? 아니면 네가 솔직히 요즘 엄마 말을 잘 들은건 아니잖아? 그래서 선물을 안주셨나보다."      

" 그래도 내가 엄마가 시키는 거 힘들어도 다 했는데,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리딩게이트도 매일 안 빼먹고 하고 바이올린 연습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셨으니까 엄마라도 오늘 선물 사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해서 풀이 죽은 아이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산타할아버지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흥분된 마음으로 채 날이 밝지도 않은 새벽에 일어나 혼자 선물을 찾아다니다 선물꾸러미를 발견하면 가슴이 너무 떨려 풀어보지 못하던 아이, 선물을 등뒤로 숨기고 자고있는 엄마아빠에게 달려와 절대로 눈 뜨지 말고 자기가 셋을 세면 눈을 뜨라고 흥분해서 말하던 , 눈을 뜨면 자랑스럽게 자기가 받은 선물을 짜잔하고 내밀던 사랑스런 어린 겸이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애고, 우리아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이제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도 못 받고... 나쁜 산타할아버지네 , 엄마랑 이따가 거니에 가자  선물 하나 사줄게~"     

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아들한테 또 말렸구나'  싶었지만 ~ ,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아이에게 가슴 설레며 선물을 풀어보는 기쁨 한 번 정도는 주어도 되지 않을까? 내년엔 다시 산타로 복귀를 해야 되나 어쩌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던 이천이십이년, 열대의 나라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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