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이별하는 기계

“사람은 이별하는 기계이다”란 유명한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의 생물 교과서의 첫 장의 제목이 “이별에 대처하는 생물의 자세”이니 의무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며 응당 알아야 할 문장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과서에는 사람이 이별하는 기계가 되기까지의 계보학적인 설명은 실려있지 않다. 괜히 어려운 문제로 초등학생들을 헷갈리게 한다는 논리를 대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더 발전된 설명이 실려있지 않은 것을 보면 자본가들이 교과서 제작사에 로비를 했음이 분명하다. 

 음모론이 패배자들의 발악이라는 말은 씁쓸하지만 이 경우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나는 다시 이별을 했다. 이제 365번째의 이별이다. 내 이별의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다. 친구 중에는 천 번을 넘어선 녀석도 있으니까.


“이별 예측기”를 처음 개발한 곳은 가글이란 망해가던 회사였다. 가글은 원래 안경 회사에서 출발했지만 IT 발전에 편승해, 쓰기만 하면 이성이 더 멋있어지고 예뻐 보이는 안경을 개발했다. 창업자는 “뷰티 글래스”에 대해 말하길, 자신은 어릴 적부터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 왔다고 했다. 

처음에 제품은 발 네 개 달린 듯이 팔려나갔다.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에게 남편에게 부인에게, 사람들은 서로에게 돈 아까워하지 않고 선물했다. 어떤 작은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뷰티 글래스” 의무 착용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데모스트레이션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민들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냐면서”. 또 어떤 부부들은 이혼에 이르기도 했다. 아기를 볼 때 늘 “뷰티 글래스”를 쓰는 남편 때문에, 아니면 “뷰티 글래스”를 쓰지 않고는 잠자리를 갖지 않는 부인 때문에.

하지만 출시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가글은 그 물건은 모두 리콜 조치했다. 처음엔 가글 회사원들이 무차별적으로 테러 당하더니 나중에 가글의 CEO는 근본주의자들에게 끌려가 사막의 벙커에서 참수 당했다. 전 세계인들은 이 끔찍한 장면을 “네튜브”에서 모두 보았다. “뷰티 글래스”에 때문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낙태율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만 아름다워져도 그렇게 많은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가글의 임원진들은 이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고 세계산부인과협회와 모종의 거래도 있었다고 한다. 리콜 조치를 단행한 뒤에도 극성 종교인들이 안경을 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테러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안경은 사라졌다. 세계 국가들이 나서서 눈 나쁜 사람들이 라식 수술을 받는데 보조금을 지급했고, 한동안 안과의사들은 막대한 돈벌이 때문에 일등 신랑감과 신부감이 되기도 했다.


세계에서 약 5억 명 정도가 1년 내에 라식 수술을 받았다. 헌데 5억 명은 자신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겼음을 곧 알게 됐다. 이성을 보면(때론 동성이기도 했다) 그 사람과 자신이 사귀게 되면 언제 이별할 것인지 정확한 날짜가 홍채에 맺혔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번에 사고를 친 것은 종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성 간에 언제 이별하게 될지 안다면 낙태율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으로 봤던 것이다. 가령 홍채에 “9999년”이라 찍히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은 천재 과학자들의 바보 같은 착각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별하는 기계”가 되는 쪽을 택했다. 사람들은 인생을 더 즐기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에서 “운명”이란 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해 전에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지만, 길거리를 걷다 보면 내 눈에 “9999년”란 숫자를 찍게 하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내 짝이 될 것이란 말은 과학적으로 틀린 말이 되었다. 

 라식 수술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세상의 일부 사람들만이 “이별의 때”를 안다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행복추구권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이미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눈을 파낼 수 없는 이상, 답은 하나뿐이었다.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모두 라식 수술을 받아야 했다.  

머리 좋은 혁신가들과 돈 많은 자본가들은 이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가에서 받은 보조금에다 사비로 돈을 더 지불하면, “이별의 때”뿐 아니라 “적절한 애무 방법과 체위에 따른 오르가즘 지수”까지 제공하겠다고 했다. 가령 본인의 입술의 두께와 질감과 타액의 유량 등과 상대방 귀의 크기와 지방도와 굴곡도를 계산해, 두 부위가 접촉했을 때 어느 정도의 쾌감을 주고 받는지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참 뒤에는 상대방의 사는 곳과 취미, 직업과 재산, 교제 경력까지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이는 물론 본인의 정보를 먼저 제공한 뒤의 일이었다. 이뿐 아니라 상상도 못할 많은 기술들이 우리 눈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행히 교제 경력 정보는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우리 눈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하게 됐고 또 더 많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365번째 헤어진 여자와 사귄 시간은 7일이었다. 내 홍채에 찍히기로 그녀와 나는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나와의 이별의 때가 언제로 찍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법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말할 수 없게 돼있었다. 그녀는 작고 통통하고 상냥한 20대 초반의 아이였다. 내 스타일이었고 딱히 헤어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딱히 헤어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세상엔 나와 맞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 나왔을 때, 벌써 한 여자가 내 쪽으로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 눈에 “9999년”이 찍혔다, 모든 거리에서 거의 모든 여자가 그렇듯이. 우리는 어차피 “이별하는 기계”이니 상관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