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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촛불의 美學

나는 이베리아 반도의 끝을 지나 모로코로 갔다. 모로코에는 여행서에는 나오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은 모로코의 명소와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있어 나름의 방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누구에게나 그 마을은 멋진 석양이 비껴서 있는 마을로 기억된다. ‘아밀리에’(그 마을 이름은 ‘아밀리에’일 가능성이 높다)까지 가는 교통편이 없다. 그래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저녁에야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멋진 석양이란 것은 사실은 가장 쓸쓸한 석양이다. 하늘의 화려한 색감과 다시 보지 못할 구름의 무늬들을 보면 슬퍼진다는 것은 인간이 원래를 쓸쓸한 것들이란 말이다.

 마을 입구에는 입은 옷 이외에는 모든 것을 두고 가라고 적혀 있었다. 괄호 속의 말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돈을 들지 않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물건이라고는 주머니에 100달러 지폐 다섯 장과 어깨에 두른 숄이 다였다. 모로코 전통시장에서 산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숄은 구석까지 모두 펴면 내 몸보다 더 컸다. 그때 목덜미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폐를 땅에 묻고 숄을 두르고 마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어가면서도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길 초입에서 저 끝까지 양쪽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른 쪽 골목도, 그리고 그 너머의 골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벤치 같은 것은 따로 없었기에 나는 막 가로등이 켜진 곳 근처의 바닥에 앉아 멍하니 가게들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저는 30분 전부터 외로워졌습니다’,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놀고 싶어요’, ‘말 없이 술이 먹고 싶어요’, ‘지옥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마땅히 들어가고 싶은 가게는 없었다. 잠시 뒤 간판 하나가 뒤로 돌아가고 다른 제목의 간판이 앞으로 돌아 나왔다. ‘1시간 전까지 외로웠는데 이제 괜찮아요’. 나는 방금 간판의 제목이 바뀐 그 가게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문고리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 문은 열렸다. 가게는 생각보다 좁았다. 동시에 세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이 컸기 때문에 넓은 홀이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들어온 쪽과 반대편의 골목길이 보이는 창가에 마주앉았다. 그곳엔 푸른 산호초 같은 눈빛을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가게 이름답게 쓸쓸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조금 떨고 있었다. 나는 숄을 펴서 그녀를 덮어주었다. 기하학 무늬 때문인지 그녀가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런 감각 자체가 추상적이긴 했다. 그녀의 눈은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그녀의 눈이 푸른 산호초가 있는 남태평양의 섬 같다고 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잠시 뒤 나는 거품이 잔뜩 인 커피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바깥문을 가리켰다. 다른 가게를 찾아보라는 뜻이었다.


‘거품이 잔뜩 인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든지 ‘거품이 조금이라도 인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곳’ 같은 제목의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는 없었다. 간판 제목 중에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단어는 ‘아멜리에’였다. ‘아멜리에가 좋아하던 케이크를 파는 곳’, ‘아멜리에게 어울리는 치마를 팔았던 곳’이라든지. 어쩌면 모로코의 이 마을을 아멜리에란 여자를 사랑했던 그리고 잃어버렸던 대부호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벌써 두 시간째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돌았던 골목 어귀를 돌았을 때 ‘촛불이 켜지 있는 곳’이란 간판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그 가게가 어떤 제목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가게 안은 어두컴컴했고 테이블마다 아직 켜지지 않은 촛불과 성냥갑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 유미와 멀리 여행 갔을 적의 일이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깊은 산속이었다. 조그만 더 북극으로 올라가면 오로라가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기웃거리고 있을 만큼의 먼 곳이었다.   

나는 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촛불도 켜지 못한 채 계속 어둠 속에 있었다. 그때 유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이 닥쳐 있었다. 북극 근처까지 예정된 여행 중에 알려온 고국에서의 전문 때문이었다. 나는 어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다. 손을 내밀어 어둠의 눈물을 닦았을 때, 가여운 유미의 얼굴이 내 딱딱한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녀는 말했다. 울음기가 단어들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있었다. 


“촛불이 필요해.”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산 아래를 향해 뛰어갔다. 내가 불을 구했을 때 이미 새벽은 지나 있었다. 스스로 몸을 태우는 촛불이 더는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유미는 밤새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유미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촛불을 켜지 않았다. 촛불을 켜면 촛불의 빛이 닿는 좁은 주변만이 눈에 들어온다. 나머지 대부분의 넓은 세상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둠 속에 잠긴다. 한 존재만 남기고 다른 것들은 모두 지울 수 있는 촛불 같은 사람이, 예전에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기에 나는 촛불을 켤 수 없었다. 먼 이국의 마을에서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유미가 있는 방’이란 간판을 단 마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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