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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창조, 그 쓸쓸함에 대하여

빈 것도 아니었고 뭔가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는 했다. 그리고 뭔가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 창조와 파괴가 수조 번 정도 반복됐을 때 마침내 창조의 알고리즘이 창조되었고 그 다음 무한이 창조되었고, 다시 유한이 창조되었고, 그리고 유무한이 창조 되었다. 인간이라면 유무한 개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해’ 특히 ‘인간의 이해’란 개념이 창조되기 전이므로 상관없었다. 그 다음 구분이 창조되었고, 법칙이 창조되었고, 그 다음 논리적 명제가 창조되었고.......그리고 목소리가 창조되었다. 이어 높은 목소리와 중간 톤 목소리와 새된 목소리와 울음 섞인 목소리와 장중한 목소리가 창조되었고.......모든 목소리가 창조되자 다음에 마침내 외침이 있었다. “내가 창조한 것들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최초 또는 마지막 하나의 것은 파괴될 수 없다”고.


최초로 창조된 것은 귀신이었다. 창조된 귀신은 멍 하나 앉아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엄청난 양의 창조가 있었다. ‘멍 하다’는 개념과 표정 그리고 ‘앉아 있다’란 개념과 자세, 왼쪽으로 고개 조금 돌리는 자세의 창조 그리고 그때의 눈 떨림의 창조 그리고 마침내 ‘지루하다’란 감정도 창조되었고, 결국에는 ‘외롭다’란 지독한 감정도 창조되었고, 물론 그 전에 ‘지독한’이란 개념의 창조가 먼저 있긴 했다. ‘지독한’이란 개념이 창조되자 ‘지독한 냄새’, ‘지독한 사기꾼’, ‘지독한 독성 물질’, ‘지독하게’란 부사, ‘지독하게 못 생긴 여자’, ‘지독하지 않은’이란 반대 개념, ‘지독하지 않은 삶’, ‘삶은 무엇인가’란 철학까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창조자는 귀신이 외로워하자 똑같은 귀신을 하나 더 창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창조자가 다른 귀신을 창조하자마자 파괴자는 추가로 창조된 귀신을 파괴해 버렸다. 귀신을 추가 창조하고 파괴하는 과정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왜냐하면 이미 ‘심심하다’란 감정이 귀신에 의해 창조된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파괴자는 예전에 파괴하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파괴자는 이제 창조자를 계속 바라보게 되었고 기다리게 되었고 갈망하게 되었고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고 싶어 했고,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창조자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이별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이별 후를 상상하게 되었고, 이별 후의 재회 가능성에 대해서도 타진해 보게 되었고, 결국에는 외로워하게 되었다. 

창조자에겐 파괴자가 밉상이었다.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귀신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괴자는 그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 해 창조자에게 창조란 도박의 재미를 빼앗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자는 ‘인내’를 창조해 보기로 했다. 사실 이는 창조라기보다는 발명에 가까웠다. 창조자는 더 이상 귀신을 추가로 창조하지 않았고 홀로 된 귀신이 얼마나 외로움을 인내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귀신은 문득 여행이란 것을 발상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공간과 이동, 감수성, 낙엽, 씨앗, 가을, 바람, 흙 등도 창조되었다. 귀신은 여행을 무척이나 떠나고 싶었다. 창조자는 귀신을 위해 배낭과 코펠을 만들어 주었고 커피와 티스푼을 만들어 주었고, 필기도구와 일기장을 만들어 주었고, 그리고 실제 있지 않은 다른 귀신의 ‘흔적’들을 만들어 주었고,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 낙엽이 그득 쌓인 쓸쓸한 길가를 만들어 주었고, 마지막으로 텅 빈 마을과 자살이란 자기파괴 개념을 만들어 주었다. 귀신은 문득 뒤돌아보니 길이 나 있어 코펠이 든 배낭을 둘러메고 무작정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마을들엔 아무도 없었다. 귀신은 텅 빈 집에 들어가 매일 밤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귀신은 결코 자살하지 않았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몇 천 개의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수억 개의 별을 헤아렸고 수천 권의 소설과 시를 썼으며, 수십 억 개의 낙엽들을 밟았으며, 흘린 눈물만으로도 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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