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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더와 스컬리 Oct 08. 2021

코피를 기다리는 마음

몰랐던 마음/좋은생각/11월호/게재/에세이

동네 언니로부터 아이의 책을 물려받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책을 받아서 감당이 안 됐다. 쇼핑백과 봉지에 담겨 있던 책들을 박스에 옮겨 담으니 여덟 박스쯤 됐다. 이 책을 모두 어디에 두어야 할까. 창고도 세탁실도 이젠 모두 책으로 가득 찼다. 이 놈의 책 욕심. 같은 책을 세 번은 읽어야 좋다고 하니 책을 모아 두고 난 늘 책장 갈이 중이다. 이번에 들여온 책도  둘 곳이 없어서 거실 한 구석에 쌓아둔 채로 몇 주가 흘렀다. 


아이의 읽기 속도를 기다리다가는 거실의 한 공간을 일 년쯤은 못 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눔을 결정했다. 두 박스는 언니에게로, 또 두 박스는 동생에게로, 그리고 또 두 박스는 친한 동생에게 주기로 했다. 언니나 동생에게는 닦지 않고 그냥 보냈지만 친한 동생에게는 끈적이는 책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물티슈로 마른 수건으로 한 권 한 권 부지런히 닦았다. 그리고 박스크기에 맞춰 책을 요리조리 넣고 테이프를 붙이는데 코피가 났다. 인생 세 번째 코피다. 나 많이 힘들었나? 훗. 


인생 첫 번째 코피, 여섯 살 무렵 유치원을 나서다 돌부리에 걸려서 대자로 넘어졌다. 쌍코피가 났다. 햇살 가득했던 날, 난생처음 맛본 붉은 피에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만큼이나 놀라셨을 선생님들은 나를 다시 유치원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작은 책상을 이어 붙인 타원형 간식 테이블에 나를 눕히셨다. 시원한 테이블 위에서 양쪽 콧구멍에 휴지를 꽂고 대자로 누워서 엄마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좋았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 유치원에 혼자 남아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는 것도 좋았고, 평소였다면 혼자 돌아갔을 길을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것이 좋았다. 코피를 좀 더 자주 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생 두 번째 코피, 초등학교 시절 실컷 뛰어놀고 집에 와서는 낮잠이 들었다. 깨고 나니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엄마는 옆에서 빨래를 개고 계셨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만큼 편안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차가운 코피가 흘렀다. 그토록 기다리던 코피가 몇 년 만에 찾아왔다. 엄마는 재빨리 휴지를 꽂아주셨고, 너무 잘 놀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그날의 코피는 정말 평온했다. 일곱 식구가 사는 집에 어째서 그날은 엄마와 나 둘 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평온함이 좋았다. 엄마의 보살핌을 독차지한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엄마와 단둘이 눕는 다면 그날이 다시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인생 세 번째 코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코피를 기다렸지만 그런 행운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엄마가 되었고, 아이가 둘둘 말아준 휴지를 코에 꽂았다. 

어린 시절 내내 기다렸던 코피라서 그럴까. 어쩐지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서 남편에게 나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남편이 그려준 내 얼굴은 조금 뾰족하고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툴툴댔고, 아이들은 재밌다며 깔깔 웃었다. 코피가 멈출 때까지 우리의 웃음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세 번째 코피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코피가 날 때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코피를 흘릴 때마다 난 적당히 약한 사람이 되었고, 보호받는 사람이 되었고, 너무나 운 좋게도 그때마다 나를 아껴주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하루 종일 힘들게 책을 닦고, 박스에 담고, 코피를 흘리며 뜻밖의 마음을 또 발견했다. 

코피를 기다리는 마음. 걱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잠시 쉬어가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그렇게 코피를 기다렸나 보다. 


이젠 더 이상 코피를 기다리지 않는다. 코피를 기다리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 나는 어른이 되었다. 보호받기보다는 누군가를 보호할 나이가 되었고, 내 곁엔 휴지를 건네는 아이들과 나를 그려주는 남편이 있다. 


인생 네 번째 다섯 번째 코피를 흘릴 때쯤엔 어쩌면 혼자일 수도 있겠지만, 차가운 코피에 얽힌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웃을 수 있겠다. 코피와 책 박스의 기억이 연결되어 이제 나는 조금 더 자주 행복을 불러올 수 있게 됐다. 피 터지게 의미 있는 노동이었고,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따뜻한 하루였다. 


< 작가의 말 : 이 글은 2021년 좋은생각 11월호에 게재된 글의 초고입니다. 어떤 부분이 윤문 되었는지 초고와 비교해 보세요.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께 도움 되실 것 같아 함께 올려봅니다. >




책 나눔을 하려고 박스에 담는데 코피가 흘렀다. 추억은 코피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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