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공부에 관심이 많아진 아이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한 학생이 나와서 자신의 공부 고민을 이야기하면 소위 말하는 일타강사들이 공부 방법을 점검해 주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들의 고민은 조금씩 달라도 목표는 모두 한 가지다. 성적이 오르는 것. 미디어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의뢰학생이 강사들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오르면 같이 손뼉 치며 기뻐하게 되는 걸 보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아이의 엄마다. 아이가 프로그램을 나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보고 나면 "아 나도 공부해야겠다." 하면서 방에 들어가는 걸 보면 기특할 때가 많다.
오늘도 아이는 엄마 같이 보자며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이끈다. 오늘은 아이와 같은 나이의 남학생이 주인공이다.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학생이 영재고등학교를 목표로 하면서 그에 맞는 노력을 하지 않는 모습이 그려졌다. 학생의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서 목표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할 거라는 말을 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 학생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학생과 엄마 사이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고무줄을 서로 당기고 있는 듯했고, 어느 쪽이 놓는 순간 상대방은 아플 게 당연해 보였다. "짜증 나." "내가 알아서 할게." 화면 속 학생은 매뉴얼처럼 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오! 저 말투 어디서 많이 본 말투인데?" 아이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더니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다 저래. 중2잖아." 무적의 단어 중2. 그때 화면 속 학생이 대화를 거부하며 "엄마가 그냥 짜증 나"라는 말을 하며 잔뜩 찌푸린 인상을 썼다. 이후 진행자가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했더니 엄마에게 말을 저렇게 해서는 안 됐다며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가 된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아이가 처음 짧게 후회한다고 했을 때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안 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인 줄 알았다. 엄마에게 말로 상처 준 것을 후회하는 중2 아이의 모습에 내 아이도 아닌데 "괜찮아."라는 말이 나왔다. 아마 저 말을 들은 학생의 엄마도 서운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조건 없는 사랑과 조건 없는 이해야 말로 사춘기 부모의 치트 키니까.
"혹시 너도 저 아이처럼 엄마에게 짜증 내고 후회한 적이 있어?"
"당연하지. 난 매번 후회해. 말해놓고 바로 후회하고 늘 그래. 죄책감이 들어" 아이는 오늘 점심 메뉴가 뭐였는지 대답하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한테 버럭 신경질을 내놓고 또 스스로 그런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했을 아이에게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작은 책상 앞, 커진 몸만큼 작게 느껴지는 침대 위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화살을 쏘았을까. 늘 아이가 이유 없이 짜증을 낼 때마다 사실 많이 서운했다. 이유 있게 짜증을 들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갑자기 짜증을 내면 머릿속에 스위치가 딸깍하고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뒤돌아 아 나오는 것이었는데, 정도가 심한 날이면 엄마한테 왜 그렇게 말하냐고 가르쳐야 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되기도 했다.
중2의 엄마라면 무릇 말하지 않아도 알아줘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자주 깨닫는 요즘이다. 말로 해결하기보다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들이 더 많다. 말로 해결하려다 보면 상처를 주고받기 일쑤고, 이 시기의 아이들은 격려나 조언은 잔소리로 묶어버리니, 조용한 지지가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늘 주변의 누군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힘들어한다. 자신의 소소한 일탈에 스스로 자책하며 자주 힘들어하는 아이를 더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봐줘야겠다. 이런 순간도 아이에게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