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친구들과 밤 9시에 모여 종종 축구를 한다. 왜 하필 늦은 시간에 만나냐고 물어보니 다들 학원을 다니고 모두의 일정을 맞추다 보면 밤 9시라는 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라고 했다. 각자 사는 곳도 다르니 정말 학원 끝나고 부랴부랴 모여야 그 시간이란다. 오늘도 학원을 다녀오자마자 친구들과 밤 축구를 하러 나간다.
"엄마! 나 다녀올게." 내가 하루 중 들을 수 있는 가장 경쾌한 '다녀올게' 다. 그렇게 나간 아이가 11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이 되어 전화하려고 하던 차에 아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이 표정이 무거워 보여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운동하다가 운동장에 핸드폰을 뒀는데 도무지 찾지 못해서 그냥 왔다고 했다. 친구들 전화로 전화해서 찾아보았냐고 물어보니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고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며 내 눈치를 봤다. 땀으로 흠뻑 젖은 아이의 얼굴 속에는 엄마한테 혼나지는 않을지, 핸드폰을 찾지 못했을 때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엄마, 빨리 다시 가서 찾아볼게."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아이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다시 나가려고 했다.
"무서워서 그러는데 엄마도 같이 가줄 수 있어?" 아이의 말에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국가대표 급의 겁쟁이 엄마인 내가 밤길 아이의 수호신이 되어주다니! 아이와 함께 밤 11시 넘은 시간에 학교운동장에 들어섰다. 학교 운동장은 대도로변에서도 아래로 한층 정도의 높이로 내려가 있어서인지 정말 어두웠다. 검은 페인트로 칠해놓은 듯한 운동장을 바라보며 전화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둠의 무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이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그 마음이 오롯이 이해됐다. "엄마가 전화를 해볼게 한번 더 찾아보자." 내 전화로 아이에게 전화를 걸고 우리는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은 운동장을 응시했다. 어둠을 뚫고 작은 빛 하나라도 우리에게 비치기를 한마음으로 바랐다. 그러기를 몇 번 운동장 가장자리 트랙옆에서 아이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네!" 보물 찾기라도 한 듯 아이는 팔짝 뛰어내려 가서 핸드폰을 찾았다.
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동안에 아이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로서의 유용함에 기분이 좋았다. 사춘기 아이에게 부모는 많은 부분에서 쓸모를 잃어간다. 부모나 가족보다는 친구 관계에서 더 위로를 받고 부모의 관심은 잔소리로 묶인다. 나의 위로보다는 친구의 한마디에 구겨졌던 마음이 펴지고, 친구의 만나서 놀자는 제안에 달뜬 기분이 된다. 어떤 일이든 엄마보다는 친구와 함께하는게 즐거운 사춘기다.
같이 있다가 잠깐 자리를 옮겨도 눈으로 엄마의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라도 사라지면 '엄마'를 찾으며 애타게 부르던 아이는 더 이상 없다. 이제는 나보다 한 뼘이나 커진 키와 넓어진 어깨를 가진 아이가 옆에서 조용히 걷는다. 아이와 정말 오랜만에 이 시간에 함께 밤길을 걸어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씩은 어린 시절 두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걷던 그 순간의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면 또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느새 아기에서 어린이로, 다시 청소년으로 자기만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가는 아이를 보는 것도 낯설지만 즐거운 일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