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주워 담는 시간
12월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세 살 딸아이는 일주일의 어린이집 겨울방학을 맞이했고
친정부모님이 겨울방학에 놀러 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기차표를 끊었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 마음이 쓸쓸하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딸아이가 옆에 탔는데 마음은 여전히 쓸쓸했다.
스물다섯 살을 맞이하던 해 겨울 나는 혼자 서울로 상경했다.
기차를 탈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재생된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영등포역에 도착해 인터넷으로만 찾아봤던 고시텔을 찾아가던 길.
영등포 뒷골목의 노숙인들이 차가운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
공원에서도 텐트를 치고 있는 노숙인들을 마주하며 낯선 곳에서 당혹스러움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필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서울의 첫 풍경이 노숙인들이라니...
그런데 고시텔에 도착하자마자 나 또한 노숙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
손바닥만 한 창문과 책상 바로 옆의 자그마한 침대. 서서 손을 벌리면 양쪽 벽이 손에 닿았다.
좁은 복도와 닭장 같은 방들이 다닥다닥. 모텔촌과 연결된 영등포 골목 한 편의 낡은 고시텔엔 바퀴벌레가 득실거렸고 옆방의 소음은 그대로 들려왔다.
서울에서 맞이하는 첫날밤. 부모님께 전화해 씩씩한 목소리로 안심을 시켜드렸던 것 같다.
(막내딸을 걱정이나 하셨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땐 서울에서 홀로서기하는 나에게 용돈 한 푼, 기차표 하나 끊어주지 않는 부모님이 야속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결정한 일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수중에는 지방에서 막내작가하면서 겨우 모은 이백만 원이 전부였다.
매달 빠져나가는 학자금대출과 자취방월세와 생활비는 빠듯했지만
기댈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삭삭 긁어모은 돈이었다.
그래서 돈을 아껴야 했다.
당시 나의 월급은 200만 원 남짓. 고시텔 한 달 월세가 45만 원.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빠듯한 돈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서울에서의 첫날 내 첫끼니는 영등포역 건너편 도로 노상에 파는 떡볶이였다. 떡볶이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배를 채워준 음식이라는 기억밖에는.
나의 두 언니들은 부모님 바람대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 길을 응원해 주셨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공무원시험이 붙을 때까지 경제적인 뒷바라지도 해주셨다. 그런 언니들처럼 나도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더라면 나를 인정해 주셨을까?
그럼에도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칭찬하고 싶은 건
부모님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때 부모님의 뜻대로 공무원을 했더라면 난 아마 지금보다 더 부모님을 원망했을지 모르겠다.
대학교 4학년 시절 봄.. 나는 방송국 작가가 되리라 확고하게 마음을 먹었다.
열심히 찾아보니 방송국 프리뷰 알바를 하면 막내작가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프리뷰알바를 하려면 나에게 없는 노트북이 필수였다.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노트북이 필요하다 말씀드려 봤지만 예상대로 대꾸가 없으셨다. 그러나 침묵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말보다 '네 주제에 무슨' 주제 파악이나 하라는 부모님의 눈빛이었다. (이후에는 끊임없이 들어본 말이지만 말이다.)
노트북을 꼭 사야만 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며 새벽 4시까지 이자카야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두 달을 꼬박 모은 돈은 50만 원 남짓. 그 당시 살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노트북을 샀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산 물건 중에서 가장 고가의 물건이었다. 디자인은 투박하고 크기도 무거웠지만 한글작업을 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내가 노트북을 산 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무렵. 나와 같은 방송작가 꿈을 꾸던 친구 역시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는 강의실에서 분홍색 신형 노트북을 꺼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주셨다고 말하던 친구의 표정이 지금도 0.8배속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단언컨대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 만큼 부러운 경험이었다. 유독 더웠던 그해 여름. 좁은 이자카야에서 진상손님을 상대하고 발 동동 구르며 힘들게 번돈으로 산 소중한 내 노트북이.. 한순간에 어찌나 투박하고 못나고 초라하게 보이는지. 마치 내 모습 같아 안쓰러웠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노트북으로 방송국 프리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프리뷰 알바를 하며 막내작가가 되고 싶다고 어필하고 꽤나 열심히 했다.
프리뷰를 했던 방송은 놓치지 않고 꼭 챙겨봤고 모니터 감상평까지 작가언니에게 보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 노력을 알아봐 준 덕에 난 지방 방송국의 특집 다큐 막내작가로 일하게 됐다.
면접을 보고 합격 전화를 받은 그날 내가 바라봤던 분홍빛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내생에 가장 기뻤던 그날. 부모님께 막내작가 합격소식을 알렸지만 부모님 두 분 중 그 누구도 축하한다는 말이 없었다. 나에겐 세상이 뒤바뀌는 간절한 일이 이뤄졌지만 부모님에겐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송작가일은 녹록지 않았다. 출근길, 횡단보도를 지나다 멀리서 달려오는 트럭이 나를 치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이따금씩 바늘처럼 솟아나는 부모님의 말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지만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떠나왔다.
내가 떠나온 곳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내가 빛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부모님은 내가 빛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깨달았다. 자식은 어디 있어도 그곳이 진흙구덩일지라도 내 눈에는 가장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까지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감사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그냥 흘러간 시간이니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 뿐.
결국 부모도 타인이다.
나는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확신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오늘도 정신승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