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두앵두 Oct 30. 2019

엄마에게 가는 길 #9 엄마니까 괜찮은 줄 알았어.

#9 엄마니까 괜찮은 줄 알았어.

그 사람과 나는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나 또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집의 큰 딸이었다. 서로 집안의 원조는 받으려는 마음도 없었고, 받을 형편도 아니었다. 우리 둘 힘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20대 중반, 학원강사일을 하던 중 여기저기서 과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 과외를 한두 개 맡아서 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입소문이 좋게 나서 과외수업이 많이 늘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과외를 하면서 한 학기 남았던 대학 수업을 마무리했다. 7년 만의 졸업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취업 준비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는 없었다. 돈을 계속 벌어야 했다. 자연스레 과외교사가 나의 직업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났어도 아빠의 빚은 끈덕지게 우리를 따라다녔다. 돈 나갈 구석은 왜 그리도 많았던지.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구멍 투성이었다.  그래도 통장에 돈이 조금씩이나마 쌓여갔다. 과외비를 받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은행에 가서 돈을 입금시키고, 통장 잔액을 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 삼천만 원이 나의 전재산이었다. 그 사람의 사정도 나와 비슷했다. 서로 삼천만 원씩을 보태고 대출을 받아 신혼집을 구하고, 가전제품과 가구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 발품을 팔고 다녔다.

결혼하는 딸에게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 게 산더미였으나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엄마는 나를 참 애달파했다. 결혼식 당일날 식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울고 또 울었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나는 그렇게 엄마의 품을 떠났다.

동생들도 각자 가정을 꾸려 엄마를 떠나갔고, 우리 모두는 부모가 되었다.


아빠는 몇 년 전에서야 재기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고, 파산선고를 받았다. 압류 예정 통지서는 더 이상 집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아 살고 있다. 엄마는 늘 그걸 마땅치 않아했다. 홀로 남겨진 엄마는 여전히 일을 많이도 했다. 이제 우리 엄마의 목표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거였다. 다들 먹고 살기 팍팍할 텐데, 엄마라도 홀로 서야 한다고 했다. 그 결심은 엄마에겐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쉴틈 없이 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자식들의 집에 김치며 반찬을 해다 날랐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나에게 집안일을 일절 시키지도, 요리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결혼하면 지겹도록 할 텐데 뭐하러 벌써 하냐고, 배울 필요 없다 했다. 결혼하고 나서 배우면 된다면서 내 속옷까지 다 빨아주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나는 신혼 초 밥하는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칼질부터가 안되었던 데다가 손도 느렸다. 주방일을 해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가 해주는 반찬이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리 해주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 엄마니까, 엄마들은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엄마는 힘들지 않은 줄 알았다. 아니. 알면서도 내 힘듬이 먼저여서 엄마의 힘듬을 외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결혼생활 12년 동안 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그동안 엄마의 희생을 먹고 살아왔다는 것. 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엄마인 내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밥 한 끼 차리는 것도,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도 모두 다 나의 수고로움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그걸 당연하듯 여기는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은 욱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늘 생각나는 엄마. 나 또한 그래 왔다는 뉘우침. 나 또한 엄마 등에 업혀 살아왔다는 자책감.


엄마의 그 수고로움이 자주 생각나는 요즘.

난 철이 들고 있나 보다.


 

이전 08화 엄마에게 가는 길 #8 자네는 필리핀에서 왔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