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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앵두 Oct 29. 2019

엄마에게 가는 길 #8 자네는 필리핀에서 왔는가?

#8 자네는 필리핀에서 왔는가?

이사를 했다. 자그마한 방이 세 개 딸린 빌라 4층.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와 살았던 마지막 집.


엄마와 내가 모처럼 집에 있던 어느 날이었던가. 삶이 힘에 부쳤는지, 지난 세월이 서러워서였는지 방에서 혼자 울고 있던 엄마를 봤다. '부모복 없는 년'으로 시작하는  넋두리와 함께였다.

'부모복 없는 년'이라는 엄마의 말은 사실 괜한 말이 아니다.

엄마는 어린 시절은 고단했다. 아빠 없이 자랐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되시는 분과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살다가 엄마를 낳은 직후 헤어졌다고 한다. 엄마는 친아빠를 꼭 찾고 싶어 했는데, 외할머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엄마에게 친아빠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친아빠가 아닌 새아빠의 호적에 올라가 있어서 서류상으로도 친아빠가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외할머니는 엄마의 친아빠 얘기만 나오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외할머니의 재혼으로 새아빠가 생긴 엄마는 온갖 구박을 받고, 갖은 고생을 했다. 집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이었고, 궂은일은 다 엄마 차지였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질 않았다. 엄마가 열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 , 그런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결혼은 한 이후,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돈을  빌려갔다. 빌려간다는 건 말뿐이었지 되돌아온 적은 없었기 때문에 가져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싶다. 한 번은 수중에 돈이 없다는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결혼 패물을 달라했다. 전당포에 잠시 맡겨 두고 급전을 쓴 다음 다시 되찾아주겠다고 했단다. 모질지 못한 우리 엄마는 결국 결혼 패물을 내주었고, 다시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랬다. 엄마는 정말 부모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그랬던 엄마에게 다시 닥쳐온 고난의 시간들은 견디기가 더 힘들었을 게다. 엄마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엄마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엄마. 속상하지. 이젠 울지 마. 엄마 고생한 거 다 알아."

"어... 그래. 엄마 고생 많이 했어. 알아주니 고맙네."

이상했다. 삼십여분은 족히 이어졌어야 할 신세한탄이 끝났다. 엄마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순간 멍해졌다. 위로의 말 한마디에 편안해지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구나 싶었다. 혼자서 아파하고, 혼자서 싸우고, 혼자서 감당했었던 그 모진 세월 동안 엄마에게 절실했던 건 따뜻한 위로였구나. 마음을 나누는 공감이었구나. 나는 왜 그동안 엄마의 마음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을까. 엄마가 힘들었을 그 시기에 왜 한 번도 엄마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을까.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엄마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예전의 엄마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 살던 시절, 엄마는 아빠와 협의 이혼을 했다. 처음엔 서로에 대한 원망, 미움, 오해가 컸겠지만,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가 버린 그 시점에선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조차 무디어진 듯했다. 다시 서로를 바라볼 여유도, 의지도 사라져 버린  완벽한 타인.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인생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하고 온 후, 속이 다 후련하다고 했다.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라 했다.


나는 친한 대학 선배 언니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30대에 막 접어들었던 시기였다.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남편은 나와는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개콘을 즐겨보고, 개그 농담이 생활화돼있고, 어른들 모시고 간 노래방 자리에서 재롱도 부릴 줄 아는 사람. 가끔씩은 아이들과 막춤을 추기도 하는 사람. 매사 진중했던 나와는 너무도 달랐던 사람. 그 다름이 서로를 맺어준 것일 수도 있겠다. 다름이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했던 일 년 여의 연애기간을 거치고 우린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 4층 집으로 그 사람을 데리고 갔다. 내가 난생처음 소개하는 남자를 우리 식구들은 참으로 신기해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눈을 꿈뻑이며 그 사람을 바라봤다. 인사와 소개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는 필리핀에서 왔는가?"

아이고야. 피부색이 까만 편인 그 사람에게 건넨 엄마의 농담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입장에선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배려였겠지만, 옆에 있던 내가 듣기에는 살벌했다. 초면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농담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당황했다.

"아! 필리핀 아니죠. 태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아주 금 까무잡잡하지요? 하하"

그 사람은 그 살벌한 말을 달콤하게 받아냈다. 감탄했다. 이만한 마음 그릇이면 됐지 싶었다.


엄마는 그 사람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여수가 본가인 남편은 직장이 전주였던 터라, 오랜 타지 생활을 했다. 남편은 늘 집밥에 목말라 있다가 솜씨 좋은 우리 엄마 손 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연애 기간 내내 주말이면 우리 엄마 밥을 먹으러 우리 집드나들었고, 엄마는 기꺼이 정성스러운 집밥을 내어주었다.


남편은 지금도 종종 나를 꼬신다. "장모님 밥 먹으러 가자!"라고.

엄마가 조금이라도 애쓰는 게 싫어 내가 다 막아내고 있지만, 나도 가끔은,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매일매일 엄마 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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